"내년 입학식 때는 왕창 와줘!"

딸아이 고등학교 졸업식 하던 날

등록 2008.02.03 11:29수정 2008.02.0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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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 한미숙

졸업식 ⓒ 한미숙

 

2일 토요일 오전,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에서 내렸다. 학교로 가는 골목길은 벌써 꽃길이 되어 화려하다. 손에 꽃다발이 들려있어선지 아무도 내게 꽃을 사라고 하지 않는다. 어젯저녁 동네에서 꽃다발을 맞추고 오늘 아침에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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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좁은 강당을 꽉 채운 졸업생들과 학부모들. ⓒ 한미숙

▲ 졸업식 좁은 강당을 꽉 채운 졸업생들과 학부모들. ⓒ 한미숙
 
졸업이나 입학식 때면 꽃다발 같은 별로 '실속' 없는 것에 돈 쓰기가 잘 안 됐는데, 이번 딸애 졸업식에는 큰 돈을 써야 될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남편은 전날인 1일 출장가서 졸업식날 저녁때나 돌아올 예정이고, 아이에게 "졸업식 하고 맛있는 회를 사주겠다"던 시동생도 출장 중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뿐인 딸애의 남동생도 누나 졸업식날엔 학교 수업이 늦게 끝난다고 한다. 학년 반 배정이 있는데 새로운 선생님이 누가 될지 다 알고 오려면 졸업식 끝난 후에야 오게 될 뿐더러 시간이 돼도 누나네 학교로 가는 길이 번거롭단다. 가만 듣고 보니 올 생각은 없고 변명만 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년 입학식' 때는 자기가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겠다고 한다. 

 

내년 입학식? 딸애는 한 해(재수) 더 도전하기로 했다. 수능이 끝나면서 차츰 결심이 선 듯 아예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웃이나 친척들, 친구들은 왜 재수를 시키냐(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도 걱정스러웠지만 딸애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했을 터였다. 친구들이 대학지원서를 쓰고 합격과 불합격의 경계에 감정이 오르내리는데 딸애는 도시락을 들고 독서실로 갔다. 다시 수험생이 된 딸을 바라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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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입구에서 밖에서 졸업식을 지켜보는 사람들. ⓒ 한미숙

▲ 강당 입구에서 밖에서 졸업식을 지켜보는 사람들. ⓒ 한미숙
 
오늘 졸업식은 딸애에게 노는 날이다. 선생님과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식이 끝나면 맛있는 점심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엄마, 학교 올 때는 꼭 이 옷을 입고 와."

 

딸애는 제 엄마가 입을 옷을 눈여겨 봐 두고 특별히 주문했다. 나는 평소에 치마를 잘 안 입는 편이라 어색하고 불편했다. 식장을 안내하는 학생들은 까만 비닐봉지 두 개씩을 나눠주었다. 바닥이 더러워질까봐 궁여지책으로 비닐을 실내화 삼아 신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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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봉지 신발 신발처럼 신어요. -.-; ⓒ 한미숙

▲ 비닐봉지 신발 신발처럼 신어요. -.-; ⓒ 한미숙

 

강당엔 졸업하는 학생들로 꽉 차서 열기가 후끈했다. 남학생 여학생 나누어 앉아있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니 검고 동그란 뒤통수가 누구랄 것 없이 다 똑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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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동아리 소개 선배들 졸업을 축하하는 후배들의 글. ⓒ 한미숙

▲ 학교동아리 소개 선배들 졸업을 축하하는 후배들의 글.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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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주삼(?) 설날이 며칠 안 남은 듯 메모지에 '깜찍한' 글도 붙어있다. ⓒ 한미숙

▲ 세뱃돈주삼(?) 설날이 며칠 안 남은 듯 메모지에 '깜찍한' 글도 붙어있다. ⓒ 한미숙

 

'어머, 여기서 애를 어떻게 찾나?'

 

딸애가 카메라를 갖고 간 것이다. 딸을 찾아야 하는데 핸드폰도 없으니 어떡하나 싶었다. 내가 찍고 싶은 장면들이 눈에 띄는데 할 수 없었다. 여학생 줄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반 별로 앉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난감할 데가. 딸애가 몇 반이었는지 알쏭달쏭하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12반인 것 같다. 나는 뒤에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혹시 12반에 이슬비'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12반 이슬비요? 걔 9반이에요. 저 쪽 에어컨 쪽에 있어요. 야~ 굴비!"

 

내가 찾기도 전에 그 아이가 내 대신 큰 소리로 부른다. 친구들 간에 부르는 딸애의 별칭이 '굴비'이다.

 

"야, 굴-비, 너네 엄마 오셨어!"

 

수다를 떠느라 제 엄마가 온 줄도 모르던 애가 나를 보자 '어, 엄-마!' 한다. 모녀상봉이 따로 없다. 재빨리 카메라를 건네받고, 아이들 시선을 받으며 9반에서 12반까지 걸었다. 그 계면쩍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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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2학년 학생들: 내년엔 저기서 열나게 공부하겠지? 3학년 졸업생들: 작년엔 저기서 죽어라고 공부했지! 학생들에게 '감옥'으로 불리는 5층 건물. 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던 3학년 교실. 그래도 때로는 그리워질 감옥. ⓒ 한미숙

▲ 감옥(?) 2학년 학생들: 내년엔 저기서 열나게 공부하겠지? 3학년 졸업생들: 작년엔 저기서 죽어라고 공부했지! 학생들에게 '감옥'으로 불리는 5층 건물. 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던 3학년 교실. 그래도 때로는 그리워질 감옥. ⓒ 한미숙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가 있을 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들었다. 그러다 어느 대목에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에서는 왜 뭉클했는지 모르겠다.

 

졸업장과 상장이 수여되고 이름이 불리는 학생이 나올 때마다 그 반의 아이들은 모두 일어났다. 그리곤 합창하듯 이름을 복창했는데 그럴 때마다 강당이 잠깐씩 들썩거렸다.

 

"우리 사진 찍어야 돼,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널 만나겠니?"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대면서 서로를 안아주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운동장은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있어서 교문 앞은 계속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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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딸애와 한 장면. ⓒ 한미숙

▲ 모녀 딸애와 한 장면. ⓒ 한미숙

 

“무자년 새해는 무쟈게 공부할 해... ㅎㅎ”

 

남편이 내 핸드폰으로 딸애한테 문자를 보내왔다. 다시 시작하고 마무리할 올해. 열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딸애에게는 아주 특별할 것이다. 집으로 오면서 뭔가 뿌듯한듯 딸애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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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차가 빠질 수 있을까? 주차장이 된 운동장 ⓒ 한미숙

▲ 언제 차가 빠질 수 있을까? 주차장이 된 운동장 ⓒ 한미숙

 

"와, 고등학교 3년을 한 군데 학교에서 보냈다아~."

 

잦은 이사로 초등학교 세 군데와 중학교 두 군데를 다녔던 감회가 떠올랐나 보다. '너는 3년이 아니라 4학년까지라고 생각해야 된다'고 하니, 오늘 졸업에 엄마만 온 것이 못내 서운한 듯 딸애가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꼭 들어가겠다는 결심도 그 말에 묻어난 건 아닐까 싶었다.

 

"알았어. 내년 입학식 때는 그럼 왕창 와줘"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 송고합니다.

2008.02.03 11:29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SBS U포터에 송고합니다.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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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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