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눈물>의 태종과 <대왕 세종>의 태종

사극 속 같은 인물과 다른 역할의 비교

등록 2008.02.03 12:36수정 2008.02.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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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화나 실존인물을 소재로 하는 사극은 작가와 배우가 대상에 어떤 시선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탄생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나 소재를 다룬 작품의 경우, 엄연히 같은 인물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작품의 사상이나 배우의 연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인물로 둔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른 해석, 다른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하느냐에 따라 호평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왜곡'이나 '미스캐스팅' 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주말 안방극장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KBS <대왕 세종>의 경우, 10년 전 같은 시간대에 방영돼 큰 인기를 모았던 <용의 눈물>과 시대 배경과 캐릭터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태종 이방원(유동근-김영철)을 비롯해 세종(안재모-김상경), 양녕대군(이민우-박상민), 하륜(임혁-최종원), 이숙번(선동혁-김주영), 민무구(신동훈-김응수)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접근법은 두 작품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태종과 양녕대군이다.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연기했던 태종이 직설적이고 감정표현이 풍부한 '열혈남아'라면, <대왕 세종>에서 김영철이 연기하는 태종은 한층 시니컬한 '포커페이스'의 노회한 정치가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태종은 칼로서 권력을 찬탈한 패륜아이면서도 조선왕조 초기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세종대의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았던 왕이라는 점에서 최근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용의 눈물>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이 정도전으로 상징되는 신권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전제군주로 묘사된다면, <대왕 세종>의 조연인 태종은 합리적 리더십을 지향하는 아들 세종과 비교되는 인물이다.

<용의 눈물>에서 이민우가 연기한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비정함과 권력의 속성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세종에게 세자의 길을 양보하고 자유인의 삶을 구현하는 반항적인 신세대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반면 <대왕 세종>에서 이준-박상민이 연기하는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을 닮아 야심만만하고 호방하며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무인(武人)형' 캐릭터로 등장한다. <대왕 세종>의 주인공인 충녕(세종)이 장자인 앙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의 정당성과 아버지-형과 대비되는 충녕의 리더십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지난해 방영된 SBS <연개소문>과 KBS <대조영>도 고구려 말기라는 같은 시대적 배경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졌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구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장이었던 연개소문에 대한 묘사. <연개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이태곤-유동근이 연개소문을 냉철하고 신중한 인물로 묘사했다면, 조연으로 출연했던 <대조영>에서 김진태가 연기한 연개소문은 직설적이고 호방하면서도 감정표현이 풍부한 인물로 묘사된다.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이상 가는 능력과 비중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양만춘(임동진)-대중상(임혁) 같은 인물들이 <연개소문>에서는 단순히 연개소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수하에 가까운 캐릭터에 그치고 있다는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 SBS가 <연개소문>의 영웅적 행보를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KBS <대조영>은 고구려 말기에서 발해 건국의 가교를 잇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차이가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왕과 나>는 10여년 전 KBS에서 방영된 <왕과 비> <한명회>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성종-연산군 시대를 다룬 세 작품은 성종과 인수대비, 폐비 윤씨, 한명회 같은 주요 캐릭터가 중복 등장한다.


<왕과 비>에서 이진우가 연기한 성종이 아내 폐비 윤씨와 어머니 인수대비 사이의 고부갈등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정치적 과단성을 지닌 영명한 군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왕과나>의 고주원이 연기하는 성종은 어을우동과의 부적절한 스캔들로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권신들의 압박과 여인네들의 치맛바람에 흔들리는 무기력한 군주로 묘사된다.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를 연기한 채시라와 김성령은, 각각 성종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집착과 암투를 펼치는 권력욕 강한 여성들이었다. 반면 <왕과 나>의 인수대비 전인화는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우선하는 보수적인 원칙주의자, 폐비윤씨 구혜선은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신세대 여성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최근 안방극장에 부는 제왕학 열풍을 타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정조이다.  현재 인기몰이중인 <이산>에서 이서진은 세손 시절부터의 정조를 연기하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정적의 위협을 딛고 진정한 군주로서 성장해 나가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성별곡-정>에서 안내상이 연기한 정조는 집권말기 수구세력의 저항과 시대적 불운에 좌절하는 고독한 개혁가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정조암살미스터리-8일>의 김상중은 어머니와의 갈등과 내면의 상처를 가슴에 숨긴 채, 철저하고 냉철한 포커페이스를 지닌 정조를 연기한다. 정조는 정치적으로는 지도자들이 지향해야 할 실용주의적 리더십의 롤 모델이면서, 개인의 상처를 가슴엔 안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세익스피어 비극' 스타일의 햄릿형 주인공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꼽힌다.

정조의 대표적 책사로 꼽히는 홍국영도 작품에 따라 접근법이 다르다. 2001년 방송됐던 <홍국영>에서는 홍국영 본인을 주인공으론 내세운다. 김상경이 연기한 홍국영은 대의명분을 위하여 세손을 도와 불의에 맞서는 개혁적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산>에서 늦깎이 신예 한상진이 연기하는  홍국영은, 냉철한 현실주의자이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선비임에도 때에 따라서는 육두문자도 마다하지 않는 독특한 현대적 인물로 등장한다.

<홍국영>에서의 인물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살신성인하는 돈키호테형 주인공의 전형이었다면, <이산>에서는 그 역할을 주인공인 정조에게 양보하고 홍국영은 모범적인 주인공이 직접 드러낼 수 없는 현실적인 욕망과 수단을 보완해주는 캐릭터로 존재한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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