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한나라당의 공천 다툼이 마침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단정적인 표현을 쓰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계속 남아있는 것은 지난 일주일간 한나라당의 상황이 그만큼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멀게는 지난 1월 23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박근혜 전 대표가 '공정 공천'에 합의한 후부터 4일 공천심사위가 최종결정을 할 때까지 "한나라당 공천 갈등이 봉합됐다"고 보도했다가 '봉합된 실밥'이 터지는 바람에 오보를 낸 언론사가 한둘이 아니다.
공심위가 1월 29일 부패전력자의 공천을 불허한 당규를 그대로 따르겠다고 발표했을 때, <오마이뉴스>는 이를 "김무성·김현철·박성범 '아웃'... 김덕룡은 '기사회생' "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한나라당이 당규를 소급적용해 돈 문제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공천을 일체 불허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차떼기로 대선자금 모았던 한나라당이 맞냐", "한나라당이 마침내 개혁정당으로 거듭나게 됐다"는 칭찬이 줄을 이었음은 물론이다.
'한나라당이 개혁정당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칭찬했는데...
문제는 하루하루 분위기가 출렁이며 공심위의 최초 결정이 번복됐다는 점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나라당에서 일어난 일들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월 29일 : 공천심사위, 김무성 최고위원 공천 불허 시사.
▲ 1월 30일 : 강재섭 대표, 공심위 결정 재고 요구하며 최고위원회의 불참. 김무성 최고위원 '탈당' 시사 및 박근혜계 '집단행동' 움직임.
▲ 1월 31일 : 최고위, 공심위에 공천신청 기준 완화 권고. 공심위, 예비심사 도입 원칙 천명.
▲ 2월 1일 : 강재섭 대표, 자택 기자회견에서 '이방호 사무총장 사퇴' 요구. 이 총장, 사퇴 거부.
▲ 2월 2일 : 최고위, 공천신청 기준 완화 권고안 마련. 강재섭 대표, 이 총장 사퇴요구 철회.
▲ 2월 4일 : 공심위, 최고위 권고 수용.
한나라당이 금고형 이상을 받은 사람에게만 공천 신청을 불허하기로 결정한 만큼 기자가 애초에 쓴 기사는 오보가 됐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한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씨는 당규 기준이 완화된 후에도 구제받을 가능성이 없지만, 벌금형을 받은 김무성·박성범 의원은 공천 탈락을 모면할 명분이 생겼다.
강 대표는 "당이 잘 되자고 걱정하는 와중에 의견차가 있었다"며 "심기일전해서 다시 출발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내분 사태를 죽 지켜보던 국민들까지 이번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 공천파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작년 4월 재보선에 패한 후 부패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미로 비리연루자의 공천 신청을 아예 받지 않겠다고 대국민약속을 했고, 이러한 약속은 같은 해 9월 당규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나라당이 분당될 위기에 처하자 당 지도부는 문제의 당규를 탄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비리전력자들에게 '특혜'를 허용했다. 김무성 최고위원은 96년에 받은 돈을 지금에 와서 문제삼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소명의 기회를 얻고 싶다면 당규를 바꾸기 전에 "소급적용을 하지 말라", "벌금형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 그런 기회를 놓쳤다면 당규를 '현실'에 맞게 바꾼 뒤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떳떳했다.
그러나 김 최고위원은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공심위 막후 협상을 할 때, 자기 문제를 슬쩍 끼워 넣어 당대표 및 사무총장과 '대장부 합의'를 했다. 한나라당이 과거처럼 제왕적 보스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왕정' 체제는 아니지만, 실권이 없는 당대표가 힘 있는 계파의 실력자들과 협의해서 당을 이끌어가는 '과두정당'이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당헌·당규를 금과옥조처럼 아무리 떠받들어도 당의 상층부를 장악한 국회의원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휴지조각처럼 만들어버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투철한 원칙론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던 박근혜 전 대표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됐다.
1년 전 한나라당 후보 경선 룰을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박 전 대표는 "몇 사람이 모여서 정해놓고 당원들에게 통보하는 게 예전 방식이다. 당원들이 허수아비냐"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원칙을 너무 강조하는 통에 이명박 당선인도 결국 두 손을 들었고, 박 전 대표는 경선에서 석패한 후 승복의 미덕을 발휘했다.
원칙론자 박근혜, 어떻게 달라졌나
박 전 대표를 '유신정치의 화신' 정도로 치부했던 기자도 그의 원칙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계파의 '좌장' 김무성 최고위원이 공천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특정 계파) 입맛에 맞춰 해서는 안 된다. 국민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납득할 수 없다"고 강력 경고했다.
"김무성 최고위원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겠다"(1월 30일)고 했던 박근혜계도 '김무성 감싸기' 비판에 직면하자 "선거법 위반자와 파렴치범, 윤리위 피징계자의 공천도 불허해야 한다"며 초강경 원칙론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결정으로 김무성 최고위원의 공천 문제가 해결되자 박 전 대표는 "이제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낮췄다. 4년 전 대표에 취임하며 "앞으로 부패 연루자는 출당·제명 등 사법기관보다 엄격히 처벌하겠다"며 눈물로 지지를 호소했던 박 전 대표의 '원칙'은 계파간 타협이 이뤄지며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방호 사무총장을 경질함으로써 당선인 측근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려고 했던 강재섭 대표도 모양새를 구기긴 마찬가지다.
강 대표는 이 총장을 '간신'으로 몰아붙이며 인사권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당대표가 만든 당규를 지키려는 사무총장을 보고 '일 같이 못 하겠다'는 게 설명이 되느냐"는 이 총장의 반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 대표는 이 총장의 사과를 받은 뒤 당무에 복귀했지만, 이 총장의 위세는 지금도 당당하다. 강 대표가 이 총장의 사과를 받았는지 아니면 이 총장이 강 대표의 사과를 받은 건지 애매할 정도다.
"당규가 원칙대로 적용되지 않으면 위원장직을 내놓을 수 있다"고 배수진을 쳤던 인명진 윤리위원장은 "한나라당이 걱정된다"고 하면서도 말을 아꼈다. 당분간 여론 추이를 지켜보겠지만, 위원장 자리를 내놓을 지는 미지수다.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이 이번 사태의 와중에 보여준 모습도 기존 정치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이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누차 '탈여의도 정치'를 공언했기 때문에 혹시나 뭔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명박 당선인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대선에 이긴 후 한나라당의 최대주주가 된 그는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며 역대 대통령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정치안정 없이 경제안정도 이룰 수 없는 법. 한나라당이 분당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그의 정치력도 시험대에 올랐다.
이 당선인이 박근혜 전 대표와 직접 협상에 나서며 양대 계파의 대타협이 이뤄지는가 싶었지만, 당대표와 사무총장이 '사퇴' 공방을 벌이는 등 당 내분사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 당선인은 여의도 정치에 거리를 둠으로써 '탈여의도 정치'를 몸소 실천했다. 당대표가 당선인과 협의해서 임명한 사무총장의 경질을 요구하는데도 그는 "대화로 해결하라"는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고, 큰형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움직여 강 대표와 이 총장 사이의 '물밑 타협'을 이끌어냈다.
이 당선인은 "때가 지금 어느 때인데 밀실에서 (공천을) 하냐"(1월15일, 강재섭 대표와의 회동)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밀실 공천'까지는 아니라도 밀실에서 예민한 문제를 처리하려는 이 당선인의 정치 스타일이 드러난 건 분명하다. 범인도피나 위장전입 등 그의 도덕적 흠결이 재거론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 계파의 확전 분위기를 서둘러 잠재운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어쩌면 투표자의 48.6%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부터 작금의 사태가 예견됐을지 모른다. 도덕성보다 능력을 택한 국민들을 보며 한나라당이 이번에도 "원칙과 명분을 지키기보다는 당리당략을 따르는 게 더 낫다"는 계산을 한 게 아닐까?
이번 사태로 인해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한나라당 사람들은 여전히 당당하다. 40~50%를 넘나드는 당 지지율이 아직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 없는 한나라당의 승승장구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일이 있어도 "정치가 다 그렇지"라고 넘어가는 유권자들의 냉소주의다.
2008.02.04 14:1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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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와 단절한다더니... '도로 차떼기당'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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