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슬프도록 그리운 내 유년의 설이여

희미하게 바랜 흑백 사진 같은 기억 속의 '설'

등록 2008.02.06 15:12수정 2008.02.0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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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번 내린 눈을 배경으로  필자, 이승철

지난 번 내린 눈을 배경으로 필자, 이승철 ⓒ 이승철

지난 번 내린 눈을 배경으로 필자, 이승철 ⓒ 이승철

 

떠올리지 마라

그 그립고 슬픈 기억을

눈보라치던 섣달 그믐날

마음도 마을도 온통 새하얀 눈 세상

 

통통통 떡 방앗간에는

인절미와 가래떡이 줄줄 흘러내리고

무명 솜저고리 검정 통치마에

떡 광주리 머리에 이고 눈발 속을 훨훨 날던 어머니

 

서울 간 자식들 기다리며

눈 빠지던 동구 밖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매캐한 연탄 냄새를 안은 채

어둔 밤 흰 눈 속을 뚫고

달덩이처럼 달려오던 그리운 얼굴들

 

한 달 내내 허기진 배 움켜잡고

쪄내는 시루떡

녹두전, 홍어찜에 영광굴비가 익어갈 때

저승 갔다던 할머니가

군침 흘리며 사립문 밀고 들어서던 밤

엉덩이 굽는 아랫목엔

가난 시름도 거덜 났다.

 

흰 눈썹의 산신령이 될까봐

억지로 치켜뜨는 눈자위 위로

또 한 해가 가고

때때옷 고샅길에도 햇볕이 쨍하다.

 

코 묻은 세뱃돈에

주근깨투성이 얼굴에도

해맑은 웃음꽃이 피던 시절

띄워 올린 방패연에

눈 시렸던 먼 옛날

슬프도록 그리운

내 유년의 설이여.

 

- 자작시 <설> 모두

 

시작노트

 

a  때때옷의 대명사 격이었던 색동저고리

때때옷의 대명사 격이었던 색동저고리 ⓒ 이승철

때때옷의 대명사 격이었던 색동저고리 ⓒ 이승철
지난 세월이 결코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는 그 시절의 추억은 마냥 그리움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벌써 50여년 전의 코흘리개 시절, 시골 농촌의 겨울은 하얗게 쌓인 춥고 깊은 눈만큼이나 가난도 깊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가난 속에서도 눈밭에서 뒹굴며 가난을 잊고 살았었지요.

 

가난을 조금이라도 면해보려고 서울이나 대도시로 떠난 젊은이들도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래도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보낸 부모들은 그 자식들이 희망이었습니다. 공장 근로자로 받는 몇 푼의 월급이 시골 살림에는 여간 요긴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가난한 살림에도 민족의 대명절인 설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해마다 맞이하는 설 명절이 가난한 어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지요, 그래도 설이 되면 서울 간 아들딸들이 한 아름씩 안고 오는 선물이 부모님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고, 마을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a  눈 덮인 산골풍경

눈 덮인 산골풍경 ⓒ 이승철

눈 덮인 산골풍경 ⓒ 이승철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설이 다가오는 것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때때옷을 얻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멋지고 말쑥한 새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일이 설날, 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날입니다. 그 시절에도 오늘은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도 나름대로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설날 아침이면 집안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의 젊은이들과 아이들까지, 어른들이 있는 집집마다 세배를 드리러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음식 장만 하느라 하루 종일 아궁이에 지피는 불로 인해 아랫목은 따끈따끈 그야말로 엉덩이가 익을 정도를 뜨겁습니다. 그 방안에서 나이든 어른들은 서울 간 아들이 돌아올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림에 젖어듭니다. 그믐날밤은 밤이 깊어도 아이들이 잠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섣달 그믐날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는 어른들의 놀림 때문이었습니다.

 

a  그 시절 홍어찜을 하고, 내장으로 끓였던 홍어탕

그 시절 홍어찜을 하고, 내장으로 끓였던 홍어탕 ⓒ 이승철

그 시절 홍어찜을 하고, 내장으로 끓였던 홍어탕 ⓒ 이승철

 

날이 밝으면 바로 설날, 아이들은 때때옷을 차려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께 세배를 드립니다. 어른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같은 덕담을 들려주며 과자나 강정 같은 음식을 나눠줍니다. 세뱃돈을 주는 어른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세뱃돈을 받을 때면 아이들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지요. 참 오랜만에 뒤돌아본 멀고 먼 어린 시절의 추억입니다.

 

엊그제 입춘을 지나서인지 섣달 그믐날인 오늘 햇살이 유난히 밝고 따뜻합니다. 요즘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은 그 시절의 '설' 이야기는 전설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 지금의 50대 이상 중·노년층들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 밤 잠들면 혹시 눈썹이 하얗게 변할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설 연휴 즐겁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나이든 어른들에게 효도하시는 것 잊지 마시구요.

2008.02.06 15:12ⓒ 2008 OhmyNews
#이승철 #설 #때때옷 #고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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