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보다 좋은 논술 교육은 없다

[나의 논술 이야기 5] 몸으로 배우게 하자

등록 2008.02.09 10:08수정 2008.02.0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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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신이 노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 폭풍이 갑작스럽게 닥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제물로 바칩시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자, 누가 제물이 되는 게 좋겠소?”

“저 외국인이요. 저 사람만 우리하고 피부 색깔이 다르잖아요.”

배안에 있던 한 젊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외국인을 흘끗거리며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어요. 나는 이제껏 죽어라 일만 했어요. 앞으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고요.” - <머릿속을 헤엄치는 지혜물고기>(최은규/꿈소담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솔직히 전부 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반응도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공정하지 못하므로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토론을 시켜보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토론이 잘 진행되지 않자 아예 노골적으로 물었다.

 

“만약 자기가 외국인이 아니라 다수 편에 속해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질문하자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 아이들도 전부 모른 척 침묵하거나, 외국인을 희생시키는데 동조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왜? 죽을 수는 없으니까.

 

희생양을 결정하라

 

이렇게 수업을 끝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체험을 하게 했다. 말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나는 신이 되어 수업 시간에 폭풍우를 일으켰다. 그리고 한 사람의 희생자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한 사람의 희생양을 결정해야 한다. 그 사람을 어떻게 결정하든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기준을 정할 일이다. 자율적으로 토론을 통해서든, 투표를 통해서든 정해라. 시간은 10분이다. 한 사람이 선정되면 그 사람은 800자 원고지를 써야 한다. 대신 나머지는 400자다. 만약 정해진 시간 내에 결정하지 못하면 전부 800자를 써야 한다."

 

800자 원고지를 쓸 사람은 한 명의 희생양이다. 그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는 산다. 그 대신 희생양을 정하지 못하면 전부 파도에 휩쓸려 죽는다. 배 위의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을 준 것이다. 아이들은 다르게 할 방법을 물었지만 난 파괴적인 신으로서 절대 다른 방법은 용납하지 않았다. 신의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아이들에게서 이런 저런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여기선 생일-을 뽑자."

"얼굴이 검은 사람으로 하자."

"제가 오늘 처음으로 왔으니까 800자 써라. 새로 왔으니 글 쓰는 연습을 해야지."

"아니, 넌 글 잘 쓰니까 희생해라."

"난, 400자도 힘들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800자를! 차라리 다 같이 쓰자."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하지만 어떤 의견도 해당 당사자의 반발에 부딪혔다.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죽음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다 보니 희생된 사람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아이들이 택한 방법은 가위바위보였다.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가장 적극적으로 기준을 세워서 한 사람을 희생시키자고 주장했던 아이가 선정되고 만 것이다. 그 아이에게 물었다.

 

"기분이 어때?"

"정말 나빠요. 어떻게 쓸지 막막해요. 다른 아이들은 좋겠다. 휴~!"

"그런데, 넌 아까 가장 적극적으로 기준을 정해서 한 사람을 선정하려고 했잖아? 왜 그랬어?"

"그거야, 그 기준으로 하면 제가 해당되지 않으니까요."

"맞아. 그렇지. 그런데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언젠가는 네가 해당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넌 희생양이 되겠지?"

"네."

"그런 거야. 어느 누군가를 희생시켜 이득을 얻으려 할 경우, 그 사람도 언젠가는 희생양이 될 각오를 해야 하는 거지. 비록 지금 내가 외국인이 아니어서 당장은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언젠가 나를 소수로 만드는 기준이 세워지면 나는 꼼짝없이 당하게 될 거야. 그래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때 소수의 희생양을 찾아 손쉽게 해결하려 하면 안 되는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얼마 후면 그 희생양이 나일 수 있으니까."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고 다시 물었다.

 

“자, 다시 묻자. 너희는 다수 편에 속해 있어. 지금 눈 앞에서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 외국인을 희생시키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이제 어떻게 행동할래? 그대로 두고 볼 거야, 아니면 외국인이란 이유만으로 희생시키는 불공평한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거야?”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렵고 심각한 문제인지 이미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체험을 하고 나자 아이들은 왜 그 문제를 냈고, 왜 800자를 쓰는 희생양을 결정하라고 했는지 분명하게 이해했다.

 

몸으로 배우는 논술

 

확실히 몇 마디 말이나 정형화된 이론보다 체험이 아이들 교육에 백배 좋다. 삶의 진리를 깨닫는데 이론이나 토론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살아가면서 실제 현실에서 부딪치는 경험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 몸으로 배운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몸으로 배운 것은 앎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체험이야말로 최고의 논술 수업 방법인 것이다.

 

결국 제비뽑기에서 뽑힌 아이는 800자를 써야 했다. 난 거기서 신이었다.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신! 신이 된 기분은 아주 좋았다. 권력자의 달콤함 같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아이들만 체험 수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는 점에서 나에게도 그 시간은 체험 수업 시간이었다.

2008.02.09 10:08 ⓒ 2008 OhmyNews
#논술 #아나하 #칭찬 #첨삭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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