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범석이가 오늘 나온다냐? 저 놈이다, 저 놈!"

일흔일곱 어머니의 애뜻한 축구사랑

등록 2008.02.14 12:07수정 2008.02.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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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흔 일곱 할머니와 열 한살 손자는 똑 같이 축구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골인!" 하는 함성 소리는 할머니가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

일흔 일곱 할머니와 열 한살 손자는 똑 같이 축구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골인!" 하는 함성 소리는 할머니가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 ⓒ 박영록

"할머니! 축구시작하니까 빨리 오세요!"


손자의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는 얼른 TV 앞으로 오셔서는 정중앙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지난 6일 설이라 온가족이 모인다고 나물을 무치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할아버지는 오히려 약간 비켜 앉으십니다. 왜냐고요?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일곱 되신 할머니의 축구 해설을 듣기 위해서지요.

"오늘은 해외파 선수들은 다 나오나?"
"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다 나온다나 봐요!"

제가 말씀드리자 단번에 지난 경기 평을 해주십니다.

"지난번 칠레전은 형편없었어! 답답하게 하더라고…."

열한살짜리 손자는 할머니 옆에 딱 붙어 앉아 같이 해설을 합니다.


"코너킥!"
"아니야! 우리편이 건드리지 않았잖아. 저런건 코너킥이 아니고 골킥이야!"
"아~ 그렇구나!"

할머니의 정확한 축구이론 강의는 아빠인 제가 해주는 것보다 더 알기 쉽습니다. 사실, 축구 경기 보다가 아들 녀석 축구 규칙 가르쳐 주는게 귀찮더라고요. 경기 흐름도 놓치고…. 아들이 축구 규칙을 헷갈려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우리팀이 공격할 때 심판의 호각소리가 삑 들립니다.

"어!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는데 왜 불지?", 손자의 궁금증에 TV 해설가도 미처 파악하지 못할 때 할머니의 명해설이 시작됩니다.

"오프사이드! 우리팀이 패스해주려고 공을 찰 때 상대방 선수보다 먼저 들어가 있었나 보다"

이건 좀 어렵습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가르쳐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지신 후,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정리하고 시골로 이사 가셔서 많이 힘들어 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몇 십 년을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오시다가 어느 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부부 두 분이서 노구를 이끌고 전셋집으로 전전긍긍 하실 때 자식들도 역시 살아가기 힘들어 위로가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 속에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오래된 당뇨가 뇌경색을 유발시켜 어머니는 한동안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고, 오른쪽으로 마비가 와서 거동도 못하셨습니다. 잘 못하면 돌아가실 때까지 나아지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에 온 가족은 큰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가진 것 다 잃어도 몸 하나만 건강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셨는데, 이렇게 허물어져 버리다니 하면서 어머니는 스스로 가라앉으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주 조금씩 회복되어지기 시작하셨고 그렇게 2002년 6월이 왔습니다. 늘 차분하시고, 집안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는 월드컵기간 동안 열광적인 모습으로 변신하셨습니다. 제가 월드컵 응원물결을 취재하기 위해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에 있다가 우리 팀의 골 장면 후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 여기 늙은이 둘이서 소파 위에 올라가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얼마나 좋으냐!"

저는 그 엄청난 붉은 물결이 넘치는 시청 앞 광장의 응원보다도 어머니의 흥분된 목소리가 더 감동 스러웠습니다.

그 후로 몇 년, 어머니는 많이 회복하셨지만, 숨어있던 관절염으로 고생하시고,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늙은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하시면서도, 국가대표 축구만 하면  잘 안 보이는 눈도 반짝반짝하십니다.

"오범석이가 잘하던데! 오늘 나왔나? 아! 저 놈이다, 저 놈!"
"에헤! 어머니는 얼굴 뺀질하게 생긴 선수를 좋아하나 보네!"

곽태휘 선수가 골을 넣자,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시며, "저 놈도 마음에 든다!" 하십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꽃미남 축구선수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올림픽 팀의 축구 경기와 월드컵 팀의 축구 경기가 있겠지요.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다가올 겁니다. 저의 작은 바람은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멋진 경기를 보여주어서 축구를 좋아하시는 일흔 아홉 되실 어머님의 여든 둘 되실 아버님의 마음에 시원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두 분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월드컵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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