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인, '영어상용의 가' 문패를 배포합시다

'영어몰입교육'은 결국 제국주의 논리일 뿐

등록 2008.02.18 08:29수정 2008.02.1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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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를 시대배경으로 한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을 꼽으라면 두 작품을 들겠습니다. 채만식의 <논 이야기>와 전광용의 <꺼삐딴 리>입니다.

<논 이야기>에서는 일제 치하 당시에는 순사를 거쳐 경찰 간부로 승진했던 사람이 해방 후에는 국회의원이 됐다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꺼삐딴 리>는 각각 일본·소련·미국 등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외세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이 쥔 기득권을 놓치지 않은 의사 이인국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꺼삐딴 리>가 조선일보 주최 동인문학상 7회 수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2007년 11월 19일자 기사 <그 동안 조선일보와 함께 빛난 사람들>에서도 '전광용'과 '꺼삐딴 리'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거론됐습니다.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영어몰입교육' 파동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꺼삐딴 리>의 한 장면이 떠올라 가끔씩 쓴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전광용씨가 때마다 말을 갈아타며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을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묘사한 장면이 지금 우리의 이 순간과도 비교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상용의 가' 문패 제작해 가정에 배포하자

<꺼삐딴 리> 이인국은, 외과 의사이자 종합병원 원장으로서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일본인들과의 밀접한 교류와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일본어가 한몫했다는 것은 독자들도 기억하실 수 있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인국의 일본어 실력은 "잠꼬대까지도 일본어로 한다"는 작가의 묘사와 그의 집 거실에 액자로 장식돼 있는 '國語常用의 家(국어상용의 가)'라는 상장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화말살 정책을 도입한 조선총독부는 일단 '언어'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언어에는 한 사회와 국가의 역사와 문화가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언어를 파괴하는 일이야말로 '내선일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이인국은, 8·15 해방과 함께 그 '국어상용의 가' 상장을 과감하게 찢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그의 삶에 엄청난 타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이인국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어를 완벽할 정도로 습득하고, '외과의사'라는 신분 상의 장점을 이용해 소련군 실력자의 혹 제거 수술을 해주며 제기한 것입니다.

6·25 전쟁 와중에 '1·4 후퇴' 당시에 월남한 이후로는, 영어를 완벽할 정도로 습득한 뒤 미국인 실력자에게 줄을 댑니다. <꺼삐딴 리>는 주인공 이인국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서술됩니다. '회상'을 하는 시점 그 자체도 주목해 볼만 하죠. 이인국은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고려 상감청자를 선물(뇌물)로 바치고 국무부 초청장을 받아내 미국행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 사회와 국가가 흔들릴 때 가장 타격이 클 분야는 다른아닌 '언어'입니다. 특히나 외세에 의해 흔들릴 경우에는, 그 외세의 해당 언어가 물밀듯 들어와 '실력'이자 '처세술'로 둔갑하곤 합니다. 언어가 정치적 무기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영어몰입교육'을 추진하는 이유, 그러면서 '사교육 조장 위험'에 '우열반 교육'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저는 <꺼삐딴 리>의 이인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가 우리 사회의 '처세술'로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동의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명박 당선인이 추진한다는 '영어몰입교육'은 사회적 생존 가능성을 점치는 무기로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어를 못해 '열반'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회 어느 분야를 가든 '영어'를 요구받는 사회라는 것도 판단해봐야 합니다. '열반의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점차적으로 줄어들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이명박 당선인, 정 그렇게 '영어몰입교육'을 하고 싶다면 가정 내의 조기교육도 자녀들에게 만만치 않은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영어상용의 가'라는 상장이나 문패를 배포하는 것도 고려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현지인 수준의 영어로 대화하고 잠꼬대까지 영어로 하는 가정이 있다면, 'The home of always speaking English'라는, 이명박 당선인의 영문 서명이 담긴 상장을 해당 가정에 배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각 가정에서도 '영어몰입교육'의 깊은 중요성을 파악하며, 옹알이를 하는 아기들에게도 '조기교육'을 실천하는 부모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영어상용의 가' 가정 출신의 구직자에게는 각 기업들이 가산점을 부여하는 정책도 강력히 권해봅니다. 자녀의 출세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꺼삐딴 리>의 '이인국'을 더이상 비판하고 욕해서는 안될 시대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노골적인 영어몰입교육, 결국 제국주의 논리일 뿐

물론, 이명박 당선인만이 '영어몰입교육'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몰입교육'이라는 표현만 색다를 뿐, 노무현 대통령도 '영어 인프라 구축'을 주장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첫 영어교육 전문방송인 EBS English가 개국했던 2007년 4월 7일 당시, 행사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축사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국가가 체계적으로 영어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선제적인 투자다."

"지난해 어학연수와 유학비용으로 해외에 지출된 돈이 4조4000억원에 이르고 영어 사교육비만 10조원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교육기회의 불균등이 계층 이동을 가로막고 사회적 통합을 어렵게 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내년에 2400억원을 투입하는 등 2009년까지 전국 1300개 초등학교에 영어체험센터를 설치하고 2010년까지 모든 중학교에 원어민 교사를 배치할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의 발언이 아니라 엄연히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명박 당선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신자유주의의 새 기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도 '실용주의'를 언급하는 가운데 "고전문학 연구자들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왜 국가가 하느냐"고 주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신자유주의의 이런 기류를 보다 확실하게 추진하면서,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교육시키겠다"는 정말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으려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실질적으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노무현 대통령과 차이나는 부분은 '노골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정도, 딱 그런 정도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돈'과 '가진 자의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 논리입니다. '실용'이라는 표현도 이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왜곡되는 측면이 강합니다. '가진 자의 경제논리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주의'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일제'를 몸소 겪은 바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제국주의는 '총과 칼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지만, 신자유주의는 그 무기를 돈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교육시키겠다"는 발상이, 일제시대 당시에 조선총독부가 추진했던 '내선일체' 정책과 흡사한 외양으로 다가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국어 상용의 가'라는 상장을 배포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인 반면, 이명박 당선인의 '더욱 노골적인 영어몰입교육'은 신자유주의 논리답게 '실용을 위장한 돈을 기반으로 한 지배질서 구축'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영어 상용의 가' 문패를 배포하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던져보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그나마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수가 수익도 안 나올 것이고 건설사들이나 좋아할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어설픈 뉴딜정책 복제판을 내놓는 것, 이 건 앞뒤가 안 맞을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사에서도 대단히 드문 사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수업>과 <꺼삐딴 리>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러시아에 양도되면서, 모국어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로 수업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씁쓸해 했던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을 기억해봅시다. 그와 함께 <꺼삐딴 리>를 떠올리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눈에 훤히 보일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총칼'이 '돈과 경제논리'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다시 한번 제국주의에 노출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남으려면 '꺼삐딴 리'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캡틴 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잘 하면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배워야" 하는 한국인,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인가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륀지 #이명박 #노무현 #영어몰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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