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한잔 못시키면서 <뉴욕타임즈> 읽으면 행복하나?

문법·독해 중심 영어 공교육 10년 효과 없어

등록 2008.02.21 09:10수정 2008.02.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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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수위가 영어 몰입교육 방침을 내놓으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당시 각 언론매체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다.

 

나는 비영어교과목까지 영어로 수업한다는 영어 ‘몰입’ 교육에는 반대하지만 영어 수업을 회화중심으로 하겠다는 데는 대찬성이다. 그래서 인수위가 몰고 온 이런 소동이 ‘10년을 배웠어도 영어로 영어 한마디 못하는’한국 영어 공교육의 문제점을 수면 위에 올리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소동이 정치적 쟁점화가 되면서 ‘영어가 국가경쟁력이다’ 라는 인수위의 주장과 ‘영어만 잘하면 국가가 발전하나’라는 반대 쪽 주장이 극력하게 대립하고 있다. 나는 이 소동에서 한 발 떨어져, 그동안 우리의 영어 교육이 얼마나 어리석었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영어 공교육 10년? 남은 건 창피한 영어 실력

 

내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에 갔을 때다. 나와 같은 방법으로 호주에 온 비영어권 유럽국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랐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라 불완전한 발음과 악센트는 숨길 수 없었지만,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들과도 쉼 없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영어 한 문장 제대로 말 못하는 한국 젊은이들. 말하기는커녕 일단 듣기부터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일본의 영어 교육 사정도 우리와 같은지 영어 정말 못하더라. 

 

한번은 독일 친구(20대 중반)에게 영어를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어봤다. 대답이 기가 막혔다. 고등학교에서 배웠단다. 그러면서 나한테 묻는 말이 너는 학교에서 안 배웠냐는 거였다. 배웠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엔 얼마 동안 배웠느냐고 물어본다. 나(빠른 82년생) 때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 수업을 받았으니, 공교육만 6년이었다. 친구에게 6년이라고 말하니 친구의 표정이 굳더라. 그나마 사교육 받은 기간은 빼길 잘했다.

 

생각해봐라. 이제 막 한국말 배우기 시작한 듯 보이는 독일인이 지난 6년 동안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독일 친구에게 해명하듯 학교에서는 맨 문법과 독해만 배웠다고 설명했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프랑스어를 못하고 러시아어도 못한다. 하지만, 그걸 못한다고 해서 창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걸 안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는 다르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정확히 말해, 영어로 말을 할 줄 몰라서 창피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영어 이데올로기나 영어 사대주의 때문에 창피한 것이 아니라, 공교육으로 6년을 배웠음에도 안 배운 것만 못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 수업을 받은 세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공교육 6년 배우고 영어 못하는 내 경우보다 10년 배우고 영어 못하는 사람들이 더 억울하지 않겠나.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내가 영어 수업을 게을리 한 게 아니냐고. 총 2년 가까운 호주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렇다. 서울 소재 명문대 출신에 토익 점수가 900점인 학생이나 이름 없는 지방대 출신에 토익점수 500점인 학생이나 결국 영어로 말하는 수준은 똑같다고 말이다. 해외거주 경험이 없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러니 대기업에서 토익 고득점자들을 뽑아놓고도 한탄하는 소리가 ‘외국 바이어한테 온 전화를 못 받는다’는 거 아닌가.

 

운전교본 책 달달 외운다고 실제로 운전할 수 있나?

 

그렇다면 이건 뭐가 잘못된 건가? 다들 동감하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문법, 독해 중심의 영어교육이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 봐라. 당신이 지금 운전을 배우는데 강사가 차는 한 번도 안 보여주면서 클러치는 이럴 때 쓰고 주차는 이렇게 하라며 책으로만 가르치면서 달달 외우라고 한다. 다 외웠는지 시험도 본다. 그 시험 백점 맞으면 운전 할 수 있나? 웃기는 소리다. 평생 버스만 타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영어 공교육이 이렇다. 운전을 가르치려면 학생을 직접 운전석에 앉히고 스스로 시동도 걸어보게 하고 기아변속도 해보게 해야 하듯, 영어라는 언어를 가르치려면 학생이 직접 말을 해보게 해야 한다. 이보다 더 단순한 진리가 어디에 있나. 특히나 말하기와 듣기는 모든 언어 학습에서 문법과 독해보다 우선해야 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영어 교과서의 단원 앞부분에 말하기와 듣기 부분이 먼저 나오는 거 아닌가.

 

이제 우리도 문법, 독해 중심에서 회화 중심으로 영어 교육을 바꿔야 할 때가 됐다. 사진은 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에서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 ⓒ 권우성

이제 우리도 문법, 독해 중심에서 회화 중심으로 영어 교육을 바꿔야 할 때가 됐다. 사진은 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에서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 ⓒ 권우성

읽기만 잘 하고 말은 못해

 

독해와 문법 실력이 높으면 물론 좋다. 하지만, 스튜어디스한테 ‘밀크’ 한 잔 못 시키면서 ‘뉴욕 타임즈’ 읽으면 뭐하나.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토익 점수가 900점에 가까운 한 친구가 외국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밀크’를 시켰더니 ‘커피’를 주더란다. 이거 웃어야 하나 아님 울어야 하나. 말하기, 듣기, 독해, 문법, 쓰기 모두 그 균형을 맞추면서 교육해야지 한쪽만 비정상적으로 치중하면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간혹 이런 주장도 들린다. 전 국민이 다 영어 잘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하던 대로 하지 왜 큰돈을 쏟아 부어서 바꿔야 하느냐고. 나는 일단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럼 우리가 왜 학교에 가나?’ 전 국민이 수학을 잘할 필요도 없고, 전 국민이 미술 배워 피카소 될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교육 방법이 틀렸고 교육 효과가 없다면 큰돈을 들여서라도 바꿔야 정상 아닌가.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런 말이 유행이었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보다 더, 현 한국 교육 현실을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우리는 지금 돈 좀 써야 한다. 공교육에 돈 안 쓰면 어디에 쓸 것인가. 영어 수업만큼은 단 1년을 하더라도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게 원어민 강사도 많이 확보하고 현 영어 교사들도 재교육해야 할 것이다.

 

학벌 사회 특성상 사교육 잠재우기 힘들어

 

영어 공교육 강화가 더 심한 사교육 시장을 몰고 올 거라는 우려가 크다. 내가 보는 사교육은 이렇다. 아무리 공교육을 강화하고 질이 개선되더라도 사교육을 줄이는 데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육을 교육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회 진출을 위한 좋은 학벌 만들기 수단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막 입학한 초등학생의 첫 국어수업에 들어가 보라. 열에 아홉은 이미 한글을 사교육으로 떼고 들어왔다. 아니, 영어도 아니고, 한글 못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불필요하게 선행학습을 하는 걸까. 그건 바로, 내 자식이 남들보다 잘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 명문중 가는 길이 명문고 가는 지름길이고 명문고 가는 길이 명문대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은 대기업 취업이나 의사, 변호사처럼 좋은 직장을 얻는 거다. 이게 모든 학부모들의 바람 아닌가. 결국 최종 목표는 남들보다 더 높은 '서열'에 서는 거다.

 

그와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블루칼라를 천시하고 육체노동의 가치를 낮게 봐서 임금이 아주 적다. 그러니 자연스레 돈 잘 버는 직업을 갖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러니 친구 아빠가 별 볼 일없는 직업을 가졌으면 그 친구랑 같이 놀지도 말라는 게 한국 부모들 아닌가.

 

반면 호주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보는 편이라 최저임금이 시간당 약 16 호주 달라(약 1만 3천원)이며 기술직 노동자의 임금이 높은 편이다. 난 특정 직업군을 천대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전에 호주에서 8살 아들을 둔 엄마에게 장차 아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내가 먼저, 한국에서는 선생님, 의사, 변호사 등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선생님은 제일 지루한 직업이라 별로고 의사는 되기도 힘들지만 하기도 힘든 직업이라 안내키고 변호사치고 행복한 사람을 못 봐서 변호사는 안됐으면 좋겠단다.

 

그 대신 아들이 배관공이 되면 돈을 잘 벌 것이니 부인한테 사랑 받을 거란다. 어쨌든 결론은, 아들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우리나라 학부모 입에서 저런 답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학 도움 없이는 회화중심 영어 수업 어려워

 

성공적인 영어 공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있다. 나처럼 회화 중심 영어 수업을 환영하면서도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대학 입시다. 수능 시험에는 아무래도 독해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독해 지문을 해석하기에는 문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결국엔 그쪽 부분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필요 없다'는 대진리가 영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계 전체를 덮고 있다. 사교육뿐만 아니라 공교육까지도 오로지 대학 입학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회화 중심의 영어 수업이 제대로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대학에서 입시 방향을 기존과 같이, 독해와 문법 중심으로 유지한다면 사교육 시장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더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서울대가 처음으로 논술시험을 도입했을 때가 기억이 나는가.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논술을 제대로 가르칠 교사 하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서울대님은 갑자기 실력 있는 학생들을 뽑으시겠다며 논술시험을 실시하셨고 고려대와 연세대 등 소위 잘나가는 대학님들도 그 대세를 따르셨다.

 

결국 학생들이 선택한 길은 뭐였나. 사교육이었다. 그때 사교육이 아니면 학생들이 논술을 어떻게 준비했겠나. 대학들 도움 없이는 실질적인 회화중심 영어수업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공적인 회화수업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부터 사라져야

 

또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그동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온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갑자기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호주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들이 하는 얘기가 한국 학생들은 타 국가 학생들에 비해 수업시간에 너무 조용하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한국에서 받는 수업이라는 게 거의 대부분, 교사의 설명 듣고 공책에 필기하는 거 아닌가. 회화중심 영어 수업이 성공하려면 일단 학생들이 입을 열 수 있도록 미리 멍석을 깔아두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거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2.21 09:10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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