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창이 수면을 뚫고 내리꽂히듯 쏟아지고...

[어느 스쿠버 다이버의 물속이야기 23] 사이판 (1)

등록 2008.02.22 11:10수정 2008.02.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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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토 동굴 동굴 안쪽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 멀리 입구가 보인다. ⓒ 장호준

▲ 그로토 동굴 동굴 안쪽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 멀리 입구가 보인다. ⓒ 장호준

2차세계대전의 상흔이 남아 있는 사이판

 

내게 사이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차세계대전에 대한 이미지였다. 소년병사들, 전쟁속의 여인들, 징용에 끌려간 조선인 남녀들, 옥쇄, 포화, 해전,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외치며 죽어간 일본인들의 희극과 비극.

 

사진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질린 비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비행기 에노라 게이호가 발진했다는 사이판의 남쪽  티니안섬 등, 일제와 관련된 어두운 이미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이판은 우리에겐 치욕이요 슬픔의 섬이었다. 멀지도 않은 시기의 일이지만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책이나 영화로 본 그런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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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포대 한 많은 슬픔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을 포대.지금은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있다. ⓒ 장호준

▲ 일본군포대 한 많은 슬픔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을 포대.지금은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있다. ⓒ 장호준

 

다이빙장소를 사이판으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L의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P와 나는 해외 다이빙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 때문이다. L이 가자면 어디라도 따라가야 할 판이었다. 모든 선택의 권한은 L에게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해외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다이빙을 해온 다이빙의 백전노장이었다.

 

 티니안, 괌, 로타, 팔라우, 추크(chuuk. 옛 지명 Truk) 솔로몬 등, L은 이름만 들어도 꿈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리아나 제도의 섬과 인근 섬들의 수중환경을 설명했다. 로타에 가면 몸체가 3~6 미터나 되는 가오리들의 환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고, 팔라우에 가면 망그로부 나무에 사는 물고기와 무독성 해파리를 볼 수 있으며, 거북을 타고 물속을 거닐 수 있는 섬도 있다는 등, 그는 자신이 다녀 본 섬들을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꿈에 현실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새벽하늘이 부옇게 열릴 때 우리는 사이판에 도착했다. 일행은 L과 P와 나, 셋이었다. 우리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잠깐의 수면을 취하고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다이빙 숍으로 갔다. 그 시절 사이판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다이빙 숍이 없었다. 우리가 갔던 다이빙 숍은 주인 이외의 직원들은 모두가 필리핀 사람들이었고 손님들은 우리 이외에는 전부 일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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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토동굴 입구 필리핀 다이빙가이드가 그로토를 내려다보며 다이빙 환경과 순서를 설명하고있다. 여기서 백수십계단을 내려가면 외해와 연결된 바다가있다. ⓒ 장호준

▲ 그로토동굴 입구 필리핀 다이빙가이드가 그로토를 내려다보며 다이빙 환경과 순서를 설명하고있다. 여기서 백수십계단을 내려가면 외해와 연결된 바다가있다. ⓒ 장호준

 

꿈의 그로토 동굴

 

첫 다이빙 장소로 그로토 동굴을 잡았다. 그로토로 가는 다이버들의 개인장비들이 트럭에 실렸다. 특이한 점은 장비를 실을 때 일본인 다이버고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렬로 쭉 늘어서서 트럭에 싣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생소한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어어! 얘들 왜 이래요? 우리도 실어야 되는 건가?"

"우린 손님이잖아."

우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당황했다. 우리나라에선 다이빙 숍측에서 하는 일들을 거기선 손님들이 하고 있었다. 다이빙이 끝나고도 그들은 마찬가지였다.

 

그로토로 가는 도중에는 여기저기 아직도 전쟁의 상흔들이 남아있었다. 일본군 포대도 있었고 한국인들의 위령탑도 있었다. 누구나 피해 가고 싶은 광포한 한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이판 다이빙의 백미는 그로토 동굴이다. 세계 5대 다이빙 포인트의 하나라는 곳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10대 포인트의 하나라고 하지만 당시에 우리 자신이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없었기에 그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바다에 닿은 절벽의 언덕 위에서 가파른 경사의 계단 백십여개를 내려가면 수영장만한 바다가 있는데 주위는 계단 높이만큼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한 움큼의 바다는 물밑으로 절벽 너머 바깥쪽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그로토 동굴은 여기에 있는 해식동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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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니안으로가는 보트 그 바다의 무지개 ⓒ 장호준

▲ 티니안으로가는 보트 그 바다의 무지개 ⓒ 장호준

 

자연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수중에는 외해와 연결된 세 개의 동굴이 있다. 절벽 안쪽에서 보면 사실은 동굴이라기보다는 세 개의 아치가 외해와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굴의 위치가 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아침 햇살이 바다를 뚫고 들어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우리와 함께한 대부분의 일본인 다이버들은 갓 스물을 넘긴 듯한 초보 다이버들이었다. 그들은 사이판에서 다이빙 교육을 받고 실기실습을 한 다음 다이빙 라이센스를 받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물로 들어간 이후에도 한참동안 입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 따로 입수했다.

 

오전 11시 입수가 시작됐다. 오 미터, 팔 미터, 십 미터, 수심이 깊어갈수록  어른거리던 햇살이 서서히 밝아왔다. 우리는 동굴 안쪽으로 유영해 들어갔다. 수심 십오 미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동굴 바깥쪽 바다위에서 비치는 햇살이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햇살은 마치 날카로운 창 수천 개가 수면을 뚫고 바다 밑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L과 P도 얼어붙은 듯 멈춰있었다. 우리는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잠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앞서가는 다이버들이 유영하는 모습이 이 장엄한 광경에 눌려, 한 마리 작은 벌레가 꼬무락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물은 무심히 일렁거렸고 햇살은 가차 없이 장중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잊었다. 햇빛이 물을 통과하는 순간 햇살로 변하고, 수많은 햇빛의 뼈다귀들이 물속에 살대를 세우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잊은 채 관성에 떠밀려 제 3 동굴 밖으로 밀려나왔다. 동굴 안쪽을 스치면서도 햇살 이외에 무엇을 봤던가 하는 기억도 없었다.

 

그러나 동굴 밖 외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열대바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 있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로토는 햇빛이 연출하는 세계 최고의 수중 쇼다. 우주와 바다가 어울리는 한 바탕 환상의 꿈이요, 햇살의 영광이요, 물의 긍지며, 어둠이 연출하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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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 마나가하섬 앞의 일본군 난파선, 한 다이버가 난파선 옆으로 접근하고 있다. ⓒ 장호준

▲ 난파선 마나가하섬 앞의 일본군 난파선, 한 다이버가 난파선 옆으로 접근하고 있다. ⓒ 장호준

 

한 순간 세 개의 세상을 스치다!

 

동굴 밖에는 범돔 수백 마리가 가이드의 손 주위로 먹이를 찾아 모여들었지만 우리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런 광경을 보라고 연출하고 있는 필리핀 가이드가 불쌍히 여겨졌을 정도였으니까. 맛좋은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어찌 개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모름지기 그 여운을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외해엔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가 물결을 일렁이며 머리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제 1 동굴로 들어왔다. 외해는 조류가 우리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서 절벽을 붙잡고 간신히 들어왔다. 탱크의 공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동굴 안의 풍경이 그때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이버들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 고기들, 멈추어 선 듯 천천히 움직이는 물고기들, 그때서야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출수를 하면서 자그마한 사고가 있었다. 한 일본인 청년이 물 밖으로 나오다 기절을 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 몸속의 산소까지 다 쓰는 바람에 기절했을 것이다. 다행히 가이드에게 일찍 발견되어 그는 응급처치를 받고 숨을 돌렸다.

 

우리는 물 밖으로 나와서 바위에 걸터앉았다. 모두 다 말이 없었다. 한 순간 세 개의 세상을 스치고 그 감정을 바로 정리할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 두 세계를 거쳐 또 다른 세계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로토 해저동굴이었고 우린 감동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야, 꿈같다. 다이빙하면서 이것 못 본 사람은 정말 억울하겠다. 그지?"

P가 슈트 윗도리를 벗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오줌을 갈기며 말했다. 우리는 P를 둘러쌌다.

"다음 포인트는 어데요? 여기서 계속했으면 좋겠는데."

P가 L을 보고 다시 물었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갑시다. 여긴 다음에 와서 다시 실컷 보도록 하고."

그러나 P는 다시 이곳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P는 그의 말대로 억울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나는 P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는 내가 그에게 그 이후에 내가 본 그로토의 영광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야 할 것이리라. 아니면 그때 쯤에는 이미 그에겐 전설이 되어버린 그로토를 지키기 위해 “첫 번째가 가장 좋아 나는 그걸로 족해”하며 다시는 들으려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인가.

 

- 계속

2008.02.22 11:10 ⓒ 2008 OhmyNews
#장호준 #물속이야기 #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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