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기로 가득한 친구들

[자전거 세계일주 56] 멕시코 오브레곤(Obregon)

등록 2008.02.26 10:23수정 2008.02.2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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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 즐거운 식사 시간 ⓒ 문종성

▲ 소방서 즐거운 식사 시간 ⓒ 문종성

오브레곤 소방서에서 종일 인터넷질 중이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소방서 맞은편 도로에 위치한 타코집에 가곤 한다. 주인은 며칠 째 추리닝 차림으로 찾아오는 내가 이제는 반가운지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 친구."

"안녕하세요, 타코 3개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부터 한다. "여기 타코 3개 추가요.", "3개 더 주실래요?" 더 이상 맛있는 거 앞에서 절약을 논하긴 싫었다. 근데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건지 9개가 연속으로 정신없이 들어갔는데도 속이 허하다. 멕시코 음식 앞에선 꼼짝없이 푸드파이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멕시칸들의 말이 더 인상적이다.

"멕시코 음식이 남미에서 가장 맛이 없지. 아마 남미로 내려가면 훨씬 더 맛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걸세."

 

도대체 타코도 모자라 고르디따스, 퀘사디야, 토스따다, 토르따 등등 이 정도가 맛이 없다면 대체 뭐가 맛있단 말인가? 그렇게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살짝 남미 음식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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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코 육류대신 어류가 들어간 타코 ⓒ 문종성

▲ 타코 육류대신 어류가 들어간 타코 ⓒ 문종성

 

벌써 사흘 째. 소방서 도미토리에 난 꿈쩍 않고 그렇게 사흘 동안 뒹굴고 있는 것이다. 콧물감기 때문이다. 젊은 녀석이 약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어줍잖은 자존심에 그저 버티고 있었는데 내내 콧물에 재채기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소방서의 모든 대원들이 돌아가며 배려를 해 준 것이다. 그들은 편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식사 시간에는 불러서 음식을 대접하는 등 여기 머무는 시간 동안 최대한 몸을 쉴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나흘째 되는 날 몸을 추슬러 겨우 자전거 위에 몸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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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팔팔 끓는 기름에 튀겨내는 토르띠야와 고기 ⓒ 문종성

▲ 요리 팔팔 끓는 기름에 튀겨내는 토르띠야와 고기 ⓒ 문종성

"멋진 친구! 앞으론 좋은 일만 생기길 바래. 아미고! 기억할게."

 

정작 기억해야 할 대상은 바로 당신들인 것을. 마지막까지 몸 걱정을 해주던 오브레곤 소방서 대원들과 인사를 하고는 다시 무거운 바퀴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날은 밤늦게 나바호아에 도착했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의 정보를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저 부딪혀서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변두리 쪽으로 들어왔기에 황량해 보이는 도시에서 숙소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다 경찰서를 발견하자마자 '됐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한 걸음에 달려갔다. 강도 사건 후 경찰 의존도는 상당히 높아졌다. 멕시코 경찰(물론 소방서는 더 완벽한 무결점)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대면서 이미 최고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숙소에 대한 난제를 해결하려 경찰서에 들어갔는데 가자마자 피자를 대접해준다. 한 번 쯤 교양있게 거절도 해야 하는 것을, 마음과는 다르게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나온다. 시원한 콜라에 곁들여 피자를 먹고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소란스런 경찰서에서 난 특별한 배려로 직원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편안히 쉴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가까운 근처 숙소를 알아봐 줄게요."

 

앙헬이라는 경찰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TV를 보고 경찰들과 잡담을 하고 또 콜라 한 잔 마시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흡족한 미소로 발걸음을 내게 돌리던 앙헬은 갑자기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당신 잘하면 오늘 호텔에서 묵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설마 호텔 숙소를 알아봐 준 건가 생각했는데 다음에 말이 폭풍감동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 사람(그의 상관)이 당신이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걸 보고 대단하다며 아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실로 파격적인 특혜였다. 그저 숙소만 알아봐 줘도 괜찮은 건데. 그리고 그 상관이 직접 나를 픽업해 주기 위해 업무를 마치는 동안 앙헬과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오, 이런! 그래서 에르모시요에서 카메라와 비디오 카메라를 몽땅 잃어버린 거예요?"

 

그는 내 얘기에 더 안타까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괜찮아요. 덕분에 그걸 계기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잃어버린 건 아쉽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인데요 뭘."

"그래도… 도대체 잃어버린 게 얼만데요?"

 

"음, 한 2500달러 정도?"

"적지 않은 액순데. 그래서 경찰엔 신고했어요?"

 

"하긴 했는데 뭐 그냥 형식적으로만 대답하고 별 노력도 않은 것 같아요."

"흠."

 

앙헬 본인도 경찰인지라 그런 사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니,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만난 경찰들은 정말 친절했어요. 그들 아니었음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다들 '친구, 친구!' 이러면서 정말 오래 알던 친구처럼 잘해 줬거든요."

"다행이군요. 멕시칸 경찰들 알고 보면 정말 좋아요. 에르모시요에서의 일은 안타깝지만 잊어버리세요. 더 좋은 일이 앞으로 많이 생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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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호아 경찰서 직원들 맨 오른쪽이 앙헬. ⓒ 문종성

▲ 나바호아 경찰서 직원들 맨 오른쪽이 앙헬. ⓒ 문종성

 

이윽고 상관이라는 풍채 좋은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여기에 온 걸 정말 환영하오."

 

카를로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넉살로 나의 마음을 단번에 편안하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일이 이제 끝나서. 많이 기다렸죠?"

"아니에요. 다들 잘해줘서 별로 지루하지 않았어요."

 

"어서 자전거랑 짐들을 다 트럭에 실으세요. 당신은 오늘 밤 특별히 호텔에서 자게 될 겁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근데 공짜로 도움 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런데 왜 호텔씩이나…?"

 

"당신은 경찰서를 찾은 손님이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경찰서로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죠. 에르모시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멕시코 경찰들은 친절하답니다. 당신이 여기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에요."

 

카를로스의 말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를 귀찮은 일처리를 해 줘야 하는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고 친구로 마음을 열어 준 것이다. 자전거와 짐들을 경찰 트럭에 싣고 나가려는데 경찰서 안에서 내내 나를 보살펴 준 앙헬이 생각나 인사차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앙헬, 고마워요. 덕분에 정말 좋은 만남이 됐고 오늘 밤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문? (멕시코에선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이름대신 성인 '문'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문은 발음상 '달=루나"라는 뜻이므로 사람들이 훨씬 쉽게 기억하고 부르기도 편안해 한다.) 아니에요. 언제든지 어려운 일 있으면 경찰을 찾아가도록 해요. 그들이 당신을 힘껏 도와줄테니까. 그리고 이건…."

 

"이게 뭐예요?"

"음, 큰 상심이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달리는 걸 보니 용기가 대단한 것 같아요. 얼마 되지 않은 액수지만 혹시라도 에르모시요의 일 때문에 경찰에 대한 섭섭함이 있다면 잊어주길 바래요.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가끔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가는 길 조심하구요."

 

미리 준비한 듯 하얀 봉투를 건네주는 앙헬의 손을 바라보다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싶어질 만큼 감정이 세차게 올라왔다. 자꾸만 내 시나리오에 벗어나는 일들이 나를 당혹시켰다. 그저 고마움에 인사만 하려고 들렀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나의 안전을 유의하고 걱정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할까 머리 속에서만 맴맴거리는 중에 앙헬의 눈도 오랫동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God bless you(그대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만 짤막하게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You, too(당신도)"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며 가볍게 손을 드는 앙헬을 보며 우린 정말 서로가 신의 축복이 가득해야 한다며 스스로 절대당위성을 마음 속으로 기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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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하는 중 ⓒ 문종성

▲ 호텔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하는 중 ⓒ 문종성

 

그날 밤 카를로스는 자신의 지갑을 털어 나바호아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호텔에서 머무르게 했으며 다음 날 아침에도 깜짝 방문해 와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대접해 주었다.

 

'도대체 내가 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마음에 부담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어쩐지 알 수 없는, 내가 이것의 몇 갑절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전에 없는 사명감 또한 부담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훨씬 더 많이 밀려 들어왔다.

 

"여기서 남미 끝까지 갔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간다니 참…. 쉽진 않겠지만 성공하길 바래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을 테니. 그리고 언제나 하늘이 당신을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고마워요,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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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삐야(Capilla)에서 1년에 한 번 연례행사로 사람들이 이 곳에서 축제를 연다고. 이들은 까삐야에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리고, 간단히 준비해 온 음식을 서로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눈다. ⓒ 문종성

▲ 까삐야(Capilla)에서 1년에 한 번 연례행사로 사람들이 이 곳에서 축제를 연다고. 이들은 까삐야에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리고, 간단히 준비해 온 음식을 서로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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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로 드려요 까삐야 옆에서는 옥수수 껍질에 쌓은 타말레스(Tamales)와 매운 기가 있는 쵸코라떼를 누구에게나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 문종성

▲ 무료로 드려요 까삐야 옆에서는 옥수수 껍질에 쌓은 타말레스(Tamales)와 매운 기가 있는 쵸코라떼를 누구에게나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 문종성

 

여운 짙은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호텔에서 나와 태양이 주는 따스한 온기에 온 몸을 맡긴 채 달려보니 확실하진 않지만 어쩐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에 한껏 기분이 업 되었다. 그리고 향수에서도 꽃에서도 맡을 수 없던 향기가 느껴졌다.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사람의 향기. 단언하건대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친구를 주셨고, 서로 친구가 되라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미치도록 명확하게 그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누구 노래따라 세상에 뿌려진 사랑을. 사랑의 온기로 가득한 친구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2008.02.26 10:2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 #문종성 #멕시코 #비전노마드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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