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 집누지앙 사람들은 비탈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아득해 보인다.
최성수
어쩌면 평생 가장 오래 버스를 타보는 것이 아닐까?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도시 구경을 하고,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닐까? 저 아득한 산비탈 어느 집에서 가슴 부풀며 걸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토하고 토해 더 이상 올릴 것이 없는지, 흰 비닐 봉지 속에 우윳빛 위액만 가득하다. 나는 그 사내를 보며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전학 오던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살다 난생 처음 서울로 오던 그 해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안흥에 나와 다시 원주행 버스를 타고,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 일 년 가야 두어 번 버스를 탈 수 있었던 내게 그 하루는 정말 끔찍했다. 청량리역에 내렸을 때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승객들은 왜 또 그리 많았는지, 앉을 자리가 없던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차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버스 운전기사는 승객이 많으면 차를 좌우로 마구 움직여 사람들을 모으는 운전을 하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굴곡이 많은 노선이었는데, 차가 지그재그로 마구 흔들리자 나는 그만 속엣것을 다 올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토하는 순간, 그 복잡하던 차 안에 순식간에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지던 신비로움을. 그리고 그 버스, 시영버스를.
어쩌면 저 사내도 오랜 세월 뒤 오늘의 이 괴로운 행차를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웃으며 자기 딸에게 이 순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비닐봉지에서 얼굴을 뗀 그 사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그 눈물이 시간을 거슬러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같이 느껴진다.
갑자기 차가 멈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나는 고개를 내밀고 창 밖을 바라본다. 그때 차 문이 열리고 근엄한 표정의 공안 둘이 올라선다. 승객 모두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공안은 앞자리부터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하기 시작한다. 승객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신분증을 꺼내 들고 있다. 공안은 몇몇 사람들에게 계속 무어라고 질문을 해 댄다. 사람들은 주눅 들린 말투로 공손히 대답을 하고, 공안은 여전히 다그치듯 무언가를 묻는다. 우리에게 다가온 공안이 손을 내민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그러면서 내가 일행 세 명의 여권을 내밀자, 공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여권을 받아들고 버스를 내려버린다. 기다리라는 말도 없다.
공안이 내려가고 나자 버스가 갑자기 움직인다. 내가 ‘우리 신분증을 받아야 한다’고 소리치자 기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길 옆으로 댄다. 길을 터주기 위해 차를 움직였을 뿐인데 괜히 지레짐작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길가를 서성인다. 한동안, 여권을 가져간 공안은 보이지 않고, 길 저편 거센 물줄기소리만 요란하다. 저 물이 흘러 누지앙의 일부가 되리라. 그리고 그 물은 흘러 흘러 미얀마를 향해 국경을 넘을 것이다. 거침없이 흐르는 물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경계를 만들고 구획을 짓고, 넘어갈 수 있는 길도 넘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길 한가운데로 염소 떼를 몰고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마치 오래 전 시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풍경이다. 말을 끌고 스적스적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간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보는 것 같다. 누지앙 들머리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발을 디디는 것 같은 착각에 나는 잠시 여권 생각을 잊는다.
그때, 공안이 여권을 가져다주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다시 버스가 출발한다. 중국은 검문할 때만 사회주의 국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건물들이 제법 들어서 있는 번화한 소도시가 나타난다. 리우쿠다. 따리를 출발한 지 다섯 시간만이다.
작은 도시 리우쿠, 누지앙이 흘러오며 대협곡을 이루다 마침내는 그냥 평범한 강으로 바뀌는 도시 리우쿠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흘러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누지앙은 천리 협곡을 버리고 빠오산을 거쳐 미얀마로 흘러든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이름을 바꿔 샬윈강이 된다.
누지앙 천리 여행, 차마고도(茶馬古道) 옛 길 여행이 이제 리우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비지앙 마을에서 누지앙을 바라보며리우쿠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봄 날씨다. 배낭을 메고 터미널 앞을 잠시 서성인다. 리우쿠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푸꽁(福貢)으로 갈까, 아니면 바로 푸꽁으로 갈까 망설이는데, 나이 제법 늙수그레한 사내가 말을 건넨다.
“차 빌릴 거냐?”“그렇다.”“그럼 내 차를 빌려라.”“하루에 얼만데?”“400위안.”“너무 비싸다.”한참을 흥정한 끝에 하루 300원에 빠오처(包車 : 차를 빌리는 것)하고 리우쿠를 떠난다. 돌아오는 길에 리우쿠는 천천히 구경하기로 하고 떠난 시간은 오후 2시 40분.
우리가 빌린 차 기사는 황구어첸(黃國全), 올해 50살이란다. 나도 50살이라니 몇 년생이냐고 묻더니 자기가 한 살 더 많단다. 나는 한국 나이로, 기사는 중국 나이로 헤아리니 그가 나보다 한 살 많기는 한 셈이다. 누지앙 길을 잘 아느냐고 물으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는 엊그제 시상판나에 갔다 왔다며, 7일간이나 운전하고 다녔어도 멀쩡하다고, 누지앙은 자주 다니는 길이라며 자신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