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는 아이들, 그들만의 잘못일까

첫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화를 낸 사연

등록 2008.03.08 15:55수정 2008.03.1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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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매화 학교 뒷산에 매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매화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입니다. 아이들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더욱 귀하고 예쁘지요.

매화 학교 뒷산에 매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매화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입니다. 아이들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더욱 귀하고 예쁘지요. ⓒ 안준철


봄입니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 있지만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봄이 다시 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이 다시 오듯이, 아이들을 향한 제 마음에도 새로운 생명의 봄빛이 가득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전문계(실업계) 학교에서 20년 남짓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올해는 2학년 영어를 맡았습니다. 학기 초라 아이들 얼굴이 아직 익지 않아 전날 수업시간에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남학생 반을 들어갔는데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어딘지 따듯해 보였습니다. 수업진도를 확인하려고 한 아이의 공책을 살피다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공책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네?”      
“공책을 안 가져온 애들이 많아서 공책 정리는 다음 시간부터 한다고 하셨어요.”
“맞아. 그랬지. 그럼 전 시간에 우리가 뭐 했지?”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화 내셨어요.”

“화를 내다니? 공책 안 가져왔다고?”
“아니요. 저희들이 꿈이 없다고요.”
“꿈이 없다고 화를 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선생님이 화를 내셨어요. 저희들이 꿈이 없다고….”

아이가 했던 말을 다시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사이, 저는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아이들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첫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영어로 인사하는 법을 먼저 말해주고 난 뒤, 출석을 부르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출석을 부를 때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2초 동안만 제 눈을 바라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이유를 번호가 1번인 아이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강아무개, 네가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때 내가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게 좋아, 아니면 강아무개 수업시간에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네 이름을 부르면서 다정하게 말해주는 것이 좋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아요.”


a 아이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약동하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약동하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안준철


“그렇지? 그런데 난 머리가 썩 좋지 않아서 이름을 잘 외우지를 못해. 그래서 수업시간마다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려고 해. 눈을 마주치면서 말이지. 네 이름을 외워서 네 이름으로 불러주려고. 그러니까 좀 어색하더라도 2초 동안만 나와 눈을 마주치잔 말이야. 알았지? 그리고 대답은 네가 좋아하는 영어문장으로 해.”

꿈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르면 “예”라고 하지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영어문장으로 대답하되, 3월 한 달 동안은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어요!)”로 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웨덴 출신 팝가수 ‘아바’가 부른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강아무개.”
“I have a dream!”
“What's your dream?(네 꿈이 뭔데?)”
“예?”

“네 꿈이 뭐냐고?”
“저 꿈 없는데요.”
“방금 꿈이 있다고 했잖아?”

제 장난에 걸려든 아이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는 모른 채하고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두 번째 아이의 꿈은 경찰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구사력도 꽤 훌륭해보였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말을 영어로 말해준 뒤에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아이는 꿈이 없었습니다. 꿈이 없기는 네 번째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출석을 부르는 것을 잠깐 멈추고 칠판에 영어 문장 몇 개를 적어 놓았습니다. 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영어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꿈이 없었고, 따라서 꿈이 없는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문장만을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앵무새처럼 따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표정이 저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허탈한 심정으로 출석부를 교탁에 내려놓은 뒤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책을 열 권 이상 읽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화책도 됩니까?”
“만화책? 좋아. 요즘은 좋은 만화책도 많잖아.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된 책을 꼽아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처음엔 열 권, 다음엔 다섯 권, 두 권. 이런 식으로 손을 들게 한 뒤에 맨 나중에 한 해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해보니 그 숫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첫 수업시간이고 해서 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있어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여러분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책을 많이 읽었다고 다 훌륭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올 해도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면? 그리고 내년에도 책을 한 권도 안 읽을 거라면?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게 된다면?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잡은 뒤에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면? 그렇게 마음에 양식이 될 만한 단 한 권도 책도 읽지 않은 채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면?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면?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기까지 말하고 아이들의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감을 잡은 듯했습니다. 책상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앉아 있던 한 아이가 자세를 바로 잡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꿈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꿈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함부로 놔두지 하지 않아요. 어쩌면 꿈을 가진다는 것은 불편한 일일 수도 있어요. 꿈이 없는 사람은 하루 종일 피시방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아요. 꿈이 없는데 하루 종일 피시방에 눌러 지낸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지금 여러분 대신 화를 내고 있는 지도 몰라요. 여러분은 작년 한 해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도 전혀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은 꿈이 없어서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낼 줄도 모르니까요.”

a 동백 동백꽃 핀 등나무터널 아래로 아이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봄을 닮은 아이들이.

동백 동백꽃 핀 등나무터널 아래로 아이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봄을 닮은 아이들이. ⓒ 안준철


a 동백 동백꽃 핀 모습이 제각각입니다. 활짝 자태를 드러낸 꽃도 있고, 이파리로 슬그머니 한쪽을 가린 꽃도 있습니다.

동백 동백꽃 핀 모습이 제각각입니다. 활짝 자태를 드러낸 꽃도 있고, 이파리로 슬그머니 한쪽을 가린 꽃도 있습니다. ⓒ 안준철


꿈이 없는 아이들은 자기를 가꾸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마다 첫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꿈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꿈을 꾸지 않는 것이 꼭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가진 것이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적 배려가 필요합니다.

“작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학생이 올해 책을 두 권씩이나 읽게 된다면 그것도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해보는 것은 대단한 일이니까요. 공책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학생이 지금부터 공책정리를 제대로 한다면 그것도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최고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일을 기어이 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날 수업은 이런 영어대사를 주고받으면서 끝이 났습니다.

“Do you have a dream?"
"Yes, I do. I have a dream!" 
#꿈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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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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