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계석. 경복궁 근정전 품계석. 이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정근
부패한 선배 세력을 타도하겠다고 뭉친 동인은 퇴계(退溪) 이황, 남명(南冥) 조식, 화담(花潭) 서경덕의 문인(門人)들이었다. 그들이 내거는 기치는 도덕성이었고 중심에 김효원이 있었다. 도성의 동쪽에 있던 김효원의 사랑채는 유성룡, 이산해, 이발, 우성전, 최영경이 선배들을 성토하는 장(場)이었다.
현대 정치사에서 ‘차떼기 당’이라는 말처럼 “서인은 태반이 훈척세가다(西人太半勳戚勢家)’라는 딱지는 치명적이었다. 동인에게 기선을 빼앗긴 서인은 위기를 느꼈다. 이 때 동서분당을 극구 말리던 율곡이 서인에 합류했다. 서인을 이끌던 심의겸은 입이 째졌고 그가 살던 도성 서쪽은 단비가 내렸다.
동인에게 밀리던 서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의 친구 성혼은 아버지 성수침을 통하여 정암 조광조와 닿아 있고 정암은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지며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이니 사림파의 뿌리였다. 조의제문(弔義帝文) 파동으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비조다.
상대적으로 우월적 정통성을 확보한 서인은 정철 응징문제로 갈등을 빚다 이산해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과 우성전, 유성룡의 남인으로 세포분열했다. 분열 DNA는 북인 조식, 남인 이황이라는 학맥이었다.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구름은 만나면 갈라지고 세력은 뭉치면 흩어진다광해 조에 득세한 북인은 대북, 소북으로 나뉘어 내홍을 겪다 인조반정으로 몰락했다. 등거리외교라는 정치실험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인은 광해의 등거리외교에 경악했다. 존주(尊周)의 대상 명나라를 멀리하고 후금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매월 망궐례를 올리던 서인들에게 배명정책은 재조지은에 반하는 가치관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인들에게 정체성의 자기부정이었다.
임금을 군(君)으로 끌어내리고 왕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킨 훈구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보수로 회귀한 것이다. 부패와 척실이라는 오명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이다. 그들을 받쳐주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고위 관직에 나가려는 사람들의 재산을 들추어 보면 억! 억! 소리가 난다. 자본주위사회에서 부와 재산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정당한 이재행위는 존경을 받는다. 기업인은 직업이 장사꾼이다. 하지만 왕조시대 선비들은 장사꾼이 아니다. 나라에 봉직하고 국록을 먹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래등 같은 집을 지니고 수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과 불법과 가까이 지냈다는 방증이 아닐까.
권력은 부를 낳았고 축적된 부는 권력을 재생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때 무력동원도 불사했다. 인조반정은 무력을 동원한 군사 쿠데타였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현대에도 쿠데타는 곱게 보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왕조시대의 쿠데타는 반역의 동전양면이다. 그들은 권력지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