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다. 이른바 한국의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한다는 시민단체의 책임자를 맡고있는 필자에게 이맘때 으레 주어지는 질문은 "올해는 어느 회사의 주총에 가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는 기대하는 답이 있다. 물론 '삼성전자'다.
1998년 장하성 교수가 사자후를 토하며 장장 13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던 우리나라 주총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그리고 2004년 필자가 주총 의장으로부터 "당신 몇 주나 갖고 있어?"라는 비아냥을 듣고 결국 경비원에게 들려나왔던 해프닝 등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년 삼성전자의 정기 주총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일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삼성 특검 수사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상황 아닌가?
그러나, 대단히 죄송하게도, 올해는 삼성전자 주총에 가지 않는다. 특검 수사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고, 따라서 삼성전자 또는 그 경영진이 불법부당행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재용 전무가 등기이사 후보로 올라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임기 만료되는 김인주 이사(전략기획실 사장)의 재선임 안건도 포함되지 않았다.
비록 필자가 시민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소액주주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주총은 어디까지 주주의 관점에서 회사의 문제를 토론하고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주총 참석은 시민단체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회사의 이익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래서 결론은, 올해는 삼성전자 주총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올해는 삼성전자 주총은 가지 않고, 우리금융지주 등엔 간다
물론 특검 수사가 끝나 (기대에 부합한 수준이든 아니든 간에) 사법절차가 시작되고, 그 와중에 삼성전자 또는 그 경영진의 연루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리고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 스스로 내부 혁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면, 필자의 미력이나마 보태기 위해 내년 삼성전자 주총에는 참석할 용의가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올해 주총 시즌에는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및 관리에 연루되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 금융회사 두 군데에 참석할 예정이다. 우선, 3월 28일 열릴 우리금융지주 주총에는 분명히 참석한다.
한편, 4월에 끝날 특검 수사 결과를 보고 (3월 말 결산법인으로서 5월에 주총이 열릴) 삼성증권 또는 삼성화재 중 한 회사를 선택할 계획이다. 마음 같아서는 두 회사 모두에 가고 싶지만, 필히 같은 날 주총이 열릴 것이기 때문에, 한 군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역량 부족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들 금융회사는 고객 권익보호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준법경영 의무를 위배하였기 때문에, 사실 선진국이라면 영업정지 내지 인가취소의 중징계를 받을 위기에 봉착해 있다. 따라서 이번 주총이 회사 내부통제장치의 문제점과 그 개선방안을 토론하는 생산적인 자리가 됨으로써 회사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그 외에 필자가 속한 시민단체는 올 상반기 중에 신세계·현대자동차·한화·삼성카드 등 네 회사의 이사들을 상대로 이들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에 대해 배상을 청구하는 주주대표소송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0.01% 이상의 지분을 6개월간 보유한 주주들이 원고로 참여해야 한다. 시민단체가 이런 거액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리 없다. 이 네 회사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의 적극적 참여 없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왜 지금 다시 소액주주운동인가?
서론이 길었다. 솔직히 필자가 속한 시민단체의 활동을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따라서 인내심을 갖고 여기까지 읽어준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각설하고….
상반기 중에 주총 2건, 주주대표소송 4건을 진행한다? 예년에 비하면 확실히 의욕 과잉이다. 2001년 필자가 장하성 교수의 뒤를 이어 책임자가 된 이후에는 소액주주운동보다는 법제도 개선 쪽에 활동의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례적인 계획이다.
더구나 소액주주운동에 대해 '월스트리트의 앞잡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비판 내지 비난이 여전한 상황에서 소액주주운동으로 복귀하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가 강화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시점에서….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다. 고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시대에 다시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한 법제도 개선 운동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개선은커녕 과거 10년간 이루어왔던 그 알량한 성과마나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다면, 출총제 폐지, 지주회사 규제 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 곧바로 법개정으로 이어지리라는 것 역시 지극히 합리적인 예상에 속한다.
반면 필자가 속한 시민단체가 지난 3년 동안 총력을 기울여 왔던 '회사기회 유용 금지', '이중대표소송제도 도입' 등 지배주주와 이사들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상법 개정안은 17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되고 다시 언급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개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주장이 있고, 다양한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낙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작은 성공 경험의 축적을 통해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길’, 이러한 점진적 접근방법에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것이 필자가 한국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다시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현 시점의 개혁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전적 규제는 완화하는 대신 사후적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출총제 등 사전적 규제의 완화 속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으나, 사후적 감독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규율체계를 전환하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이다. 또 이명박 대통령은 ‘법과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이건 필자가 평소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소액주주운동은 이명박정부의 후퇴를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 요건
그런데 사후적 감독의 강화, 법과 질서의 확립이 그냥 맡겨놓으면 이명박 정부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절대 아니다. 불법부당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감독당국과 사법당국이 알아서 억울한 사람을 보살펴줄 리 없고, 알아서 법과 질서를 세워줄 리 만무하다.
밑으로부터의 변화 요구가 없으면, 이명박 정부의 사후적 감독 강화 약속은 공수표가 될 것이고, 법과 질서 확립 약속은 노조에만 적용되는 이중잣대가 될 것이다. 이젠 시민들이 위에서 던져주는 떡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를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능동적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후퇴를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래서 다시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강조하건대, 소액주주운동이 재벌을 개혁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며, 재벌을 개혁한다고 해서 곧바로 한국사회가 선진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소액주주운동은 상법과 증권거래법에 명기된 법적 수단을 통해 한국경제의 핵심 문제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소액주주운동은 단 한 주를 보유한 주주라도 참여할 수 있는, 그래서 다수 시민들이 작지만 중요한 성공 경험의 축적을 통해 한국경제의 개혁 가능성에 대한 자기 확신을 만들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소액주주운동은 기존의 법적 권리의 충실한 실현을 통해 새로운 법적 권리의 확보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진보의 희망을 다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중한 경험을 많은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경제개혁연대는 ㈜우리금융지주, ㈜삼성증권, ㈜삼성화재해상보험, ㈜신세계, ㈜현대자동차, ㈜한화, ㈜삼성카드 등의 소액주주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소액주주들은 경제개혁연대 홈페이지(www.ser.or.kr)나 전화(02-763-5052)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08.03.12 10:4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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