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보물급 문화재와 왕릉을 둘러보고

등록 2008.03.11 14:13수정 2008.04.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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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는 예로부터 역사가 깊다.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며, 전해지는 왕릉과 남장사, 북자사 등 유서 깊은 절도 있어 한 번 둘러볼 고장이다. 최근 들어서는 자전거 박물관 등 자전거로 명세가 이어지고 곶감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용화사에는 보물 불상이 있다

 

함창읍 증촌리 용화사에는 마을에서는 미륵으로 모신다는 보물 제118호 증촌리 석불입상과 보물 제120호 증촌리 석불좌상이 있다. 용화사 마당에 들어서면 복원된 형태의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면석 각면에는 조각이 있는데 불상 혹은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화려한 탑으로 추정된다. 근래 들어 발견 되었다는 불상의 광배도 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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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탑 복원된 삼층석탑으로 기단면석에 조각이 있다. ⓒ 김환대

▲ 복원탑 복원된 삼층석탑으로 기단면석에 조각이 있다.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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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마멸이 심하나 기단면석에 있는 조가상으로 범천으로 추정된다. ⓒ 김환대

▲ 조각상 마멸이 심하나 기단면석에 있는 조가상으로 범천으로 추정된다. ⓒ 김환대

 

석불입상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m의 석불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광배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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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입상 석불좌상과 나란히 있다. ⓒ 김환대

▲ 석불입상 석불좌상과 나란히 있다. ⓒ 김환대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바라보는 방향이 일반 전각에 있는 방향과 달라 조금은 이상하였다.

 

석불좌상

 

거의 직사각형의 얼굴 형태를 하고 있고, 어깨와 팔, 다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직선적이고 각이 진 모습이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강인하며 경직된 느낌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하여 얇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 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다. 광배는 남아 있지 않으며, 대좌는 8각의 연꽃무늬 대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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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좌상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나 조각은 아주 잘 된 불상이다. ⓒ 김환대

▲ 석불좌상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나 조각은 아주 잘 된 불상이다. ⓒ 김환대

 

길게 뜬 눈, 군살 붙은 턱 등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하 말기 혹은 고려시대 초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화달리 삼층석탑

 

사벌면 화달리에 있으며 보물 제117호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몸돌은 유난히 넓고 커서 기단보다도 높다. 각 층의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처마가 반듯하며 네 귀퉁이의 위로 들린 정도가 강하여 탑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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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달리 삼층석탑 보수하고 난 후에는 탑이 깨끗해 졌다. ⓒ 김환대

▲ 화달리 삼층석탑 보수하고 난 후에는 탑이 깨끗해 졌다. ⓒ 김환대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구의 석조여래좌상이 1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나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준다. 

 

전사벌왕릉

 

화달리 삼층석탑 바로 인근에 있으며, 사벌국은 상주지방에 위치하였던 삼한 소국 중의 하나로, 일명 사량벌국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첨해왕 때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 한다. 그러자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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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벌왕릉 사벌왕릉으로 전해지나 신빙성은 미약하다. ⓒ 김환대

▲ 전 사벌왕릉 사벌왕릉으로 전해지나 신빙성은 미약하다. ⓒ 김환대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 왕릉 앞에 석물들은 후대의 것으로 전해지는 왕릉이라 신빙성은 다소 떨어진다.

 

전 고령가야왕릉 

 

여섯 가야(伽倻) 중 하나인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고령가야는 낙동강 일대인 함창, 문경,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로, <삼국유사> 5가야조와<삼국사기> 고령군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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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령가야왕릉 가야의 소국 중 하나로 고령가야의 왕릉이라 전해진다. ⓒ 김환대

▲ 전 고령가야왕릉 가야의 소국 중 하나로 고령가야의 왕릉이라 전해진다. ⓒ 김환대

 

조선 선조 25년(159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 현감 이국필 등이 묘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 후 조선 숙종 38년(1712)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있었으나 석양은 220년 1월 13일 도난당했다고 한다.

 

목가리 석조 관세음보살입상

 

사벌면 목가리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알려지지 않은 불상이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으나 머리에 쓴 보관은 다른 부처에서 찾아보지 못한 양식이며 중앙에 부처 1구를 조각한 것 등 특이점이 발견된다. 불상의 양식과 불상 주변에서 확인되는 자기편과 기와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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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리 석불입상 입상으로 단독 불인데다가 보관에 작은 불상이 이색적이다. ⓒ 김환대

▲ 목가리 석불입상 입상으로 단독 불인데다가 보관에 작은 불상이 이색적이다. ⓒ 김환대

 

상산지 <고적조>에 "송현 길 가까이에 있으며 3간 기와집 가운데 큰 석불 한 구가 안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큰 샘물이 바위 구멍 사이로 용출하는데 그 사방과 밑은 마치 함(函)과 같이 다듬어져 있으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고 겨울에는 더운물,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샘 아래로 흘러 10여부락의 논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지으므로 예부터 대정원이라 일컬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과거길로 서울가는 길목에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어 마을에서는 미륵탑이라 불렀으나 2007년 11월 도난당하고 현장에는 부재 일부만 남아 있다. 비지정 문화재의 관리 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앞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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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당한 이후 탑재 삼층석탑이었으나 도난 당하고 남은 부재이다. ⓒ 김환대

▲ 도난 당한 이후 탑재 삼층석탑이었으나 도난 당하고 남은 부재이다. ⓒ 김환대

 

주에도 볼 문화유적이 이처럼 많다. 시간내어 다시 주변을 둘러보면 못 다 본 유적들이 많을 것이다. 봄 기운이 완연해지는 날씨이다.   

2008.03.11 14:13 ⓒ 2008 OhmyNews
#용화사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전고령가야왕릉 #상주 증촌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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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진 곳에 우리문화를 찾아서 알리고 문화관련 행사를 좀 더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앞으로 우리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괌심분야는 역사유적, 석조조형물과 민속,고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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