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희랑대사상 가슴에 난 구멍은 정말 '보시'의 흔적일까

[가야산의 암자들 ③]희랑대사가 머물렀던 희랑대

등록 2008.03.13 14:17수정 2008.03.14 11:58
0
원고료로 응원
a  희랑대 오르는 길.

희랑대 오르는 길. ⓒ 안병기


금강산 보덕굴을 닮았다는 암자 희랑대

국일암에서 조금 올라가자 삼거리가 나온다. 백련암으로 가는 길과 희랑대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희랑대 가는 길은 왼쪽이다. 꽤 넓은 길이지만, 키 큰 소나무들이 길 양쪽에서 마치 길손을 호위하듯 서 있어 호젓한 느낌을 준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나반존자 기도도량 희랑대'를 알리는 팻말이 나오고, 우측으로 희랑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잔설이 남아 있어 약간 미끄러운 계단을 조심조심 밟고 올라간다. 옆으로는 산죽들이 푸르게 우거져 돌계단이 가진 삭막함을 덮어주고 있다. 아직도 눈이 덜 녹은 곳이 있어 계단 약간 미끄럽다.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벼랑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있는 희랑대가 보인다.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나서 그 위에다 자리를 잡은 듯하다. 희랑대가 아찔한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아찔하다.

계단을 오르고 나서 잠시 숨을 고른다. 어떻게 이런 낭떠러지에, 터조차 좁은 곳에 암자를 세울 생각을 했던 것일까. 만일 돌로 축대를 쌓지 않았다면 암자 지을 터조차 있지 않았을 것이다. 희랑대를 보고 금강산에 있다는 보덕굴이라는 암자와 비슷하다고 한다. 절벽 위에 제비집처럼 지어진 암자의 생김새가 닮았나 보다.

a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자리 잡은 희랑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자리 잡은 희랑대. ⓒ 안병기


a  법당과 독성전.

법당과 독성전. ⓒ 안병기


희랑대는 927년 희랑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1940년에 현옹이라는 분이 중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희랑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였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하며 해인사를 중창하기도 했다.

희랑대는 왼쪽의 불전 영역과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살림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희랑대'라 쓰인 현판을 단 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0년에 성허 스님이 지은 것이다. 안에는 지장보살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 등 육도 윤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원을 세운 보살이다.

나반존자, 목수의 꿈에 나투시다  


a  독성전.

독성전. ⓒ 안병기



a  독성전 벽화. 희랑대사의 설화를 그린 걸까. 모기가 물어서 가려운지 등을 긁고 있다.

독성전 벽화. 희랑대사의 설화를 그린 걸까. 모기가 물어서 가려운지 등을 긁고 있다. ⓒ 안병기


법당 뒤에는 독성전이 있다. 독성 나반존자는 홀로 깨우친 보살이다.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분이다.


독성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 전각이다. 1940년 희랑대를 중창할 무렵, 이화백이라는 목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두 칸은 너무 작으니 3칸으로 지어달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암반 위에 2칸 6평 정도 되는 독성전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이 꿈 때문에 3칸으로 늘려 지었다는 것. 꿈에 나타난 노인이 바로 독성 나반존자라는 얘기다.

듣자니, 이곳 나반존자는 그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독성전 기둥에 붙어 있는 주련에도 '나반신통세소희(羅畔神通世소稀)'라 쓰여 있다. "나반존자의 신통력은 세상에 드물다"라는 뜻이다. 꿈 대로 해석하면 평수에 민감한 분이 틀림없거늘….

나반존자는 보통 늙은 비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희랑대사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걸까. 독성전 벽에는모기에 물리기라도 한 듯, 한 스님이 등이 가려운지 긁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희랑 스님

a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희랑대사상.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보물 제999호.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희랑대사상.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보물 제999호. ⓒ 안병기


희랑 스님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희랑 스님이 이곳에 머물던 때, 여름철 해인사에는 모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모기들 때문에 스님들이 수행에 지장을 받자, 희랑 스님은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
그러자 해인사의 모기들은 희랑 스님의 가슴 구멍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죄다 희랑대로 모여들었다. 그 덕분에 스님들은 편안히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오기 전, 해인사 성보박물관 1층 전시실에 드렀을 때 본 목조희랑대사상의 가슴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희랑대사 조각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도저히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색채가 강렬했다. 나무 표면에 올이 고운 삼베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채색한 것이라 한다.

허공을 바라보는 듯 그윽한 눈빛, 불쑥 튀어나온광대뼈 , 오뚝한 코, 약간 미소를 머금은 듯 부드럽게 다문 입, 서로 포개진 손과 앙상한 손가락 등.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 아주 생생했다. 금방이라도 유리벽을 걸어나와 " 점심 공양은 들었는가?"라고 물을 듯했다. "이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 조각이 어디 있을까"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각상의 구멍은 전설을 밑바탕으로 해서 형상화한 것일까, 아니면 목조상에 난 구멍을 본 후세 사람들이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꾸민 것일까. 미안하지만 난 후자에다 더 무게를 둔다. 세상에 모기 없는 산중이 어디 있는가. 해인사가 모기들에게 특별히 미운털이 박혔을 리도 없고.

세(勢)를 읽는 눈이 탁월했던 희랑 스님

희랑 스님은 신라 말기,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서 해인사로 출가한 분이다. 화엄학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희랑대사의 학풍을 이어받은 균여가 지은 <균여전>에는 희랑 스님에 관한 짤막한 기록이 나온다.

신라 말기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종 대가가 있었다. 한 분은 후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이 되었고, 다른 한 분은 희랑 스님인데 고려 태조 대왕의 복전이 되었다.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란 남악파의 관혜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악파의 희랑 스님과 함께 신라 하대 화엄이론의 쌍벽이었다. 후삼국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당시 해인사의 위치는 신라와 후백제의 중간이었다.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교분이 깊던 희랑 스님이 계셨던 때문일까. 마침 이곳엔 신라 말기의 탁월한 지식인이며 당나라에서 오랫동안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이 은둔하고 있었다. 패권을 노리는 호적들에게 자신들의 집권을 뒷받침할 정치적 이데올로그가 돼 줄 두 사람이 있는 해인사는 얼마나 긴요한 곳인가. 싸움은 결국 희랑 스님의 지지를 얻은 왕건의 승리로 끝났다.

희랑 스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순수하게 화엄학에만 일생을 바친 학승이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끼어들어야 했던 불행한 사람일까. 아니면 능동적으로 권력을 지향했던 인물이었을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가 이기는 자의 편에 설 정도로 세(勢)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조각상에 난 구멍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희랑 스님의 가슴에 뚫린 의문의 구멍은 어쩌면 후백제 견훤을 지지했던 누군가가 앙갚음하고자 뚫은 것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내 상상력일 뿐이다. 상상에 꼭 근거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핍한 시대를 위해 전설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a  암자 위에서 내려다 본 희랑대. 지족암이 건너다 보인다.

암자 위에서 내려다 본 희랑대. 지족암이 건너다 보인다. ⓒ 안병기



a  혜암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머물렀던 원당암. 3배율로 찍은 것이다. 거리로 따지면 약 2km가량 되지 않을까 싶다.

혜암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머물렀던 원당암. 3배율로 찍은 것이다. 거리로 따지면 약 2km가량 되지 않을까 싶다. ⓒ 안병기


희랑대를 절경이라 하는데 암자 내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좀 답답하다. 골짜기와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지족암밖에 보이지 않는다. 희랑대를 더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요사 뒤로 해서 산기슭으로 올라간다. 암자 위에서 바라보니. 이제야 모든 풍경이 잘 보인다. 건너편 지족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아득한 산자락을 바라보니, 원당암도 바라다 보인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시다 2001년에 입적하신 혜암 스님께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암자다.

아래와 위, 불과 몇 m의 차이로 이렇게 다른 풍경이 전개될 수 있을까. 이곳에 올라오기를 참 잘했다. 작은 차이가 불러온 커다란 변화. 새삼스럽게 작은 차이가 안목을 기르는 바탕이라는 걸 생각한다. 몸이 조금만 수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몸은 어떤가. 그 시시하기 짝이 없는 사대육신은 조금만 힘들어도 쉬게 해달라고 아양을 떤다. 만일 조각상의 구멍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라면 희랑 스님은 정말 생불(生佛)이다. 나는 이 전설 없는 시대, 아름다움이 결핍한 시대를 위해 그 전설이 사실이길 바란다.

a  희랑대 요사. 아빠와 아이들이 쪽마루에 앉아 쉬고 있다.

희랑대 요사. 아빠와 아이들이 쪽마루에 앉아 쉬고 있다. ⓒ 안병기


다시 암자로 내려온다. 언제 왔는지 아이들과 아빠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 쉬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아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한 떨기 꽃 같은 평화를 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일컬어 천진보살이라 하는가.

이제 희랑대를 떠날 시간이다. 첨성대 모양으로 생긴 요사채 굴뚝은 조금 더 머물렀다 가길 바라는 눈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회자정리라는 걸 모르나 보다. 얘야, 나 역시 '마음이 굴뚝' 같단다. 그러나 이젠 그만 내려가야 한단다. 위태로운 지형 위에 자리 잡은 암자에서 얻었던 역설적인 평화도, 희랑 스님의 전설까지도 다 마음 속에서 내려놓고서.

법당 축대 아래 몇 평 텃밭에는 아직 눈이 덮여 있다. 저 눈 역시 회자정리의 이치를 알지 못해서 여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아, 저 미련한 것들, 한없이 안쓰러운.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4. 4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5. 5 일본인도 경악한 친일파의 화려한 망명 생활 일본인도 경악한 친일파의 화려한 망명 생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