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참외서리에 얽힌 추억

개구쟁이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등록 2008.03.12 18:10수정 2008.03.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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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금도 참외만 보면 어릴 적 참외서리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참외만 보면 어릴 적 참외서리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 우광환

지금도 참외만 보면 어릴 적 참외서리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 우광환

때 아닌 참외가 눈에 띄었습니다. 제 철 아닌 과일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요즘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지요.

 

반가운 나머지 그걸 사다가 먹다 보니 문득 어릴 적 참외서리 하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사실 '서리'라는 말은 참 정겨운 단어지만, 이젠 잊혀가는 단어기도 해서 씁쓸하긴 합니다. 다음은 어릴 적 참외서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윗말의 기세에 눌렸던 아랫말의 우리들

 

당시는 여름이었고 그 때, 우리 시골 동리에서는 깜상이 이끄는 웃말 아이들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네들 영웅담이 온 동리 아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이뿐이네 참외밭에서 깜상네 패거리가 유유히 비료 포대로 한 가득 참외서리를 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독보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뿐이네 할아버지가 원두막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 낸 일이기에 걔네들은 더욱 더 영웅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우리 아랫말 조무래기들은 야코가 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네 앞산 중턱에서 벌어지는 ‘임진왜란’놀이를 할 때면, 인삼밭에서 뽑아온 이영으로 엮은 멋진 갑옷을 입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군 역할을 늘 상 윗말 아이들이 도맡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진흙을 나무칼에 묻혀 싸우다가 상대방 옷에 묻히면 전사시키는 전쟁놀이가 시작되자마자, 그들은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와 우리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성을(군인들이 동리 앞산에 만든 토치카) 삽시간에 함락시키고, 우리는 분루를 삼키며 또 다시 조금 큰 나뭇잎으로 대충 엮어 만든 갑옷을 입고 왜놈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아무리 연습을 해도 윗말 아이들의 칼싸움 솜씨를 우리는 따를 수가 없었고, 이래저래 우리는 기가 팍 죽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흔들이가 이끄는 아랫말의 우리는 계속 그대로 주질러 앉아 야코죽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획기적인 일을 저질러 사태를 반전시킬 묘안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겐 사태의 반전이 필요했다

 

이윽고 장마가 끝날 즈음, 덥고 지루한 십리 하굣길에서 흔들이가 서너 명의 아이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거야. 조무래기들은 빼고 말이야. 이번엔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야 아라찌?"

"마대자루는 너무 큰 거 아닐까?"

 

한 놈이 울상을 짓자,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흔들이가 결연하게 말했습니다.

 

"아냠마! 그 정도는 돼야 돼!"

"우리끼리 그걸 들 수나 있을까?"

 

다른 한 놈도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흔들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까짓 거 나 혼자 짊어 질 수도 이썸마. 걱정하지 마."

 

그들은 내가 옆에 있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나는 겨우 열 살짜리 3학년이었고, 용사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아직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비밀 작전에는 나도 끼어들기를 소망했습니다. 어떻게든 나도 이 기회에 영웅의 반열에 올라, 덜 자란 애송이 취급에서 기어이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내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흔들이네 패에게 급기야는 약간 치사한 방법을 써야 했는데, 그만큼 나도 절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타켓으로 삼고 있는 참외밭 주인인 짝귀네 호랑이 할아버지한테 밀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결국 내 청은 가납되어졌습니다.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다

 

그 후, 용의주도하게 첩보활동을 펼친 끝에 흔들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는데, 며칠 후에 짝귀네 할아버지 환갑잔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흔들이가 참외밭주인의 손자인 짝귀마저도 한패에 넣어준다며 꼬득인 개가였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짝귀 역시 영웅칭호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 날을 디데이로 잡고, 짝귀네 마당 앞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참외밭으로 침투해 들어갈 대담한 작전에 대비해 고단한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그 날 저녁 전등불이 환하게 켜진 짝귀네 마당에 쳐진 몇 개의 천막 사이로, 온 동네 사람들이 거진 다 모여 있는 저 쪽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달빛 희미한 참외밭 뒤켠으로 능숙하게 낮은 포복으로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거침없이 어둠을 뚫고 전진하는 흔들이 패를 따라, 아버지 몰래 집에서 훔쳐갖고 온 마대자루를 움켜쥔 나와 짝귀가 뒤를 따랐습니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등에서 식은땀이 났지만, 뭐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용사의 길은 멀고 험난한 거였으니까.

 

흔들이네 공격조가 달빛에 반사되는 큰 것들을 따서 냅다 던지고, 내가 벌리고 있는 자루 아가리로 짝귀가 정신없이 받아 넣고 있을 때, 갑자기 낮고 단호한 흔들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랑으로 엎드렷!!"

 

벌렁대는 가슴을 억누르고 밭고랑에 엎어져서 저 앞을 보니, 거기 지난 봄 서울로 시집간 짝귀네 막내고모가 연신 환한 마당 쪽을 뒤돌아보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숨죽이며 코를 땅에 처박고 있는 우리 가까이는 마당의 환한 불빛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희미한 곳이었는데, 짝귀네 막내고모가 거기까지 와서는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우리 앞쪽인 시끄러운 짝귀네 마당 쪽을 향하여 앉더니 치마를 들어올리고, 쉬를 하는 거였습니다. 하, 이런.

 

희미한 달빛으로 노란 참외를 골라내던 우리 눈에는 이쁜 짝귀네 막내고모의 하얀 엉덩이가 보름달처럼 크게 보일 수밖에.

 

그러나 고랑에 일자로 줄지어 엎드린 맨 앞의 흔들이는, 자기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에서도 절제된 인내심으로 잘 참으며, 발로 뒤쪽의 머리를 툭툭 차댔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입을 막고 있으라는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짝귀네 막내고모의 쉬~ 소리가 잦아 질 즈음,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뽕~”하는 소리와 함께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봇물처럼 우리는 일제히 “와~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어서 흔들이의 "토껴!"라는 외침으로 어두운 밭고랑에서 벌떡 일어나는 물체를 보고는, 아연 실색한 짝귀네 막내고모가 자신이 쉬한 젖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냅다 달렸습니다.

 

뜻하지 않게 굴러온 영웅칭호

 

그리고 그 후, 우리는 그 중요한 작전을 실패한 작전으로 규정지으며 쓰게 한숨을 짓고 있었지만, 마을의 돌아가는 사태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윗말 아랫말을 통 틀어서 가장 이쁘기로 소문났던 짝귀네 막내고모의 엉덩이를 달빛으로나마 목격한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아이들 사이에서 대접받기 시작했고, 기어이 아랫말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윗말의 조무래기들은 끝까지 아랫말의 우리를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아련한 어릴 적 기억들은 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a 원두막 지금도 짝귀네 호랑이 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물고 앉아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원두막 지금도 짝귀네 호랑이 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물고 앉아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우광환

▲ 원두막 지금도 짝귀네 호랑이 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물고 앉아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우광환

 

2008.03.12 18:10ⓒ 2008 OhmyNews
#참외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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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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