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34] 밤에 우는 신규식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20 18:12수정 2008.03.2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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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주는 2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다. 소주는 항주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다.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 곳도 소주였다. 유럽에서 온 무역상들은 베네치아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소주에는 운하가 많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많아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김태수와 백주원은 연못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연꽃을 보고 있었다. 유원은 400년이 넘었다는 정원이었다. 정말 400년도 넘게 살았을 성싶은 나무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 백주원이 눈길을 연꽃에서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아직은 아닙니다.”
“단소는 언제 그렇게 배우신 건가요?”
“마음이 적막할 때에 불었습니다. 지난 1년은 거의 매일 불었지요.”

백주원은 조금 애처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은 악기보다 소리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안 했더라면 소리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연히 쑥대머리도 하실 줄 알겠군요?”
“네. 조금요.”

김태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쑥대머리를 부르는 그녀 앞에서 북채를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장소가 조선식 정원이 있는 한적한 툇마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찰 한(寒) 뫼 산(山), 절 이름이 한산사였다. 김태수는 절 이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묘한 데에서 미적 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가혹한 추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산사의 정경을 떠올려 보았다. 절 이름이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다. 천오백 년이나 된 그 고찰의 원래 이름은 식묘리보명탑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산이라는 칭호를 가진 한 나그네 중이 이곳에 머무른 뒤로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왜구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 강남에도 자주 출몰했었다. 한산사의 종루는 비어 있었다. 왜구가 약탈해 갔다고 했다. 절에서 불과 100m 안 되는 거리에 풍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김태수와 백주원은 풍교 너머로 뻗어 있는 운하에 눈을 주었다.

그들이 항주로 가는 배에 오른 것은 늦은 오후였다. 내일 새벽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석양이 비치는 황해 물결을 바라보았다. 김태수는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미래 같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지금 옆에 서 있는 백주원만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민제호와 민필호가 마중 나와 있었다. 네 사람은 선창가에서 국밥을 먹으며 해장술을 곁들였다. 민제호가 술잔을 김태수에게 돌리며 말했다.

“예관 선생이 한 번 뵐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관 선생이 누구시지요?”
“우리들의 지도자입니다.”

민필호가 김태수의 잔을 받으며 말했다. 그는 예관 선생을 수행하여 어젯밤에 항주에 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새벽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다시 고려상사로 오시겠다고 하시며 우리끼리 아침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백주원이 민필호가 준 잔을 비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김태수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관이라면 혹시 신규식 선생이 아니십니까?”
“아니 신규식 선생을 아신단 말씀입니까?”
세 사람은 모두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예. 제 부친의 사돈 댁 어른이십니다 그리고 제 부친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시고요.”

민제호가 환한 얼굴로 민필호와 백주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족이 하나 늘었다.”

김태수는 감동이 차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민씨 형제를 다시 만나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던 터였다. 김태수는 왠지 그들을 대하면 마음이 열렸다. 물론 백주원도 그랬다. 김태수로서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실한 동시에 인간적 기품이 있어 보였다.

신규식은 김태수의 손을 부여잡으며 아버지 김인용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김태수에게 상해에서 민필호와 함께 공부하면서 앞일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김태수는 고마운 말씀이지만 자신은 항주에 남아 고려상사의 일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규식은 민제호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 선생은 이미 성인이니 본인의 의향대로 하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규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제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신규식의 집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혼자서 온 것은 아니고 서탑의 고려여관에서 머물던 여운형이 데려온 청년이었다. 여운형은 이미 신규식과 접선이 되어 임시 정부의 기반이 될 신당 창당을 협의하기 위해 상해에 와 있었다.

여운형은 청년의 이름을 이범석이라고 소개했다. 이범석은 민필호와 비슷한 연배였지만 외모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필호는 키가 작은데 범석은 체구가 컸다. 이마가 넓고 명민해 보이는 필호와 달리 범석은 얼굴의 윤곽이 컸고 아주 용감해 보였다. 수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경성고보를 다니다 왔다고 했지만 신규식은 이범석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대장이나 장군 감이었다. 민필호와 이범석은 금세 가까워졌다. 

프랑스 조계 어양리에 있는 신규식의 임시 숙소는 2층집이었다. 2층에는 공작실과 신규식의 침실이 있었고 아래층에서는 민필호와 이범석이 기거하고 있었다. 신규식은 바쁜 일정 때문에 여가가 전혀 없었다. 중국 혁명 인사들은 거의 매일 신규식을 만나러 왔다. 모두가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국민당 인사들로서 진영사, 송교인, 호한민 등 중국혁명대의 요직 인사들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방문객들도 다 돌아가고 집 주위는 거짓말처럼 적막해졌다. 민필호와 이범석은 자리를 깔고 누웠다. 2층에서 벼루에 먹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신규식의 신음과 탄식이 이어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막 잠이 들려고 할 무렵 처절한 흐느낌 소리가 두 청년의 잠을 쫓아 버렸다.

“신 선생님이 또 우시네.”

이범석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민필호는 일어나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린 두 사람은 선생이 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침 손중산의 혁명이 좌절을 겪고 있었다. 신규식의 계획은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혁명에 성공하고 대총통에 추대된 손중산은 혁신적인 정책을 공표하였다. 그는 아편의 재배와 흡음, 여성의 전족, 가혹한 형벌 등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광동, 복건, 절강, 하남성 등의 천민을 해방시켰다. 그는 매국적 관료를 징벌했다. 그리하여 이홍장, 성선희, 풍계군, 서징 등의 토지 재산과 상공업 시설을 몰수했다. 그러나 일 미 프 독 러 등의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에서 전제주의가 종결되고 주체적인 민주공화국이 자리 잡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엄청난 이권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낙방하고 하급 무관으로부터 출발한 원세개(위안 스카이)는 일찍이 조선에 가서도 조정을 간섭하며 위세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그는 퇴폐적인 여인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발판을 만든 위인이었다. 이런 원세개를 이용한 제국주의 열강의 공작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미 통치 능력을 상실한 청국 왕조를 버리고 원세개를 대폭 지원하면서 손중산의 남경 임시정부에 가능한 모든 압박을 가했다. 손중산은 서구인들에게, ‘너희가 지지한다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했으니 너희는 이 정부를 승인하라’고 요구했지만 어느 한 나라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특히 손중산은 자신이 공부한 나라이며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라는 미국에게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는 차갑게 외면당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원세개의 정부는 중화민국으로 승인하겠지만 손중산의 남경 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냈다. 영 미 일 독 등은 군함을 양자강에 집결시켰고 러시아는 동북지방에서 군사 동원 제스처를 보였다. 그들은 원세개에게 엄청난 차관을 제공했다. 원세개는 그 자금으로 군사력을 키워 혁명 정부를 압박했다. 일본은 군사력을 직접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는등 같은 동양 이웃 나라에 대한 무력 침략을 선동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만주나 몽고에서의 이권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했다. 또한 일본은 중국에 거류하는 일본 상공인들이 이득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신속히 챙겼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손중산 정부가 지배하는 지역의 세관을 봉쇄했다. 손중산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손중산 정부에 밀정을 침투시켜 내부 분열과 파괴 공작을 획책하기도 했다.

원세개는 득의의 웃음을 감추고 조국을 충심으로 사랑한다는 액션을 취하며 손중산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객관적 정세를 읽은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타협안을 제시하며 성명을 발표하고 총통 자리를 원세개에게 내주었다. 원세개는 남경에 정부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북경에서 그의 지지자들인 북양 군벌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중국 정세의 급변은 신규식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송교인은 원세개에게 이용당하다가 그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정부 수립을 위한 내부에서의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외부 정세가 아주 불리하게 전개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 내 한국인의 정치 활동은 위축될 것이며 정부를 수립한다 해도 중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을 수도 없었다.

다시 신규식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흐느껴 울었다.

한편 신규식에게는 셋째 아우 신건식이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외국어학교를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와 절강성에 있는 의약학교를 마쳤다. 그는 항주에 있는 고려상사에 자주 연락을 가고는 했다. 하루는 신건식이 민제호, 김태수, 백주원과 함께 서호 가까운 곳에 있는 적산(赤山)에 놀러 갔다가 허물어진 담벽 속에 방치되어 있는 묘우(廟宇:신위를 모시는 집) 하나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묘우는 그렇게 방치되는 예가 드물어 그는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흥분하여 민제호를 불렀다.
“어이! 민 사장.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부서진 묘당 한 쪽에 나뒹굴어진 채,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겨나간 묘석 하나에 고려(高麗)라는 글자가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 김태수는 부쩍 관심이 일었다.

민제호가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말했다. “신 선생, 여긴 절터임이 분명하오. 대각국사 의천이 항주에 머물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일단 돌아가서 연구해 봅시다.”

백주원도 그 절이 고려인의 것이었다면 이것은 큰 발견이라고 말했다. 김태수는 이 먼 땅에 절을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면 그 당시 고려인의 중국 진출이 꽤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는 고국의 흔적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그들의 마음씨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는 기회가 되면 한국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절강성 아래 영파(닝보우)에도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곳은 고려사(高麗寺)의 옛터였다. 유학에도 조예가 깊고 의리를 중시했던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중국의 고승 정원 대사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30세의 나이에 미복(微服)을 입고 송나라에 밀항한다. 모친과 맏형인 순조는 극구 말렸지만 그의 학구열을 식힐 수는 없었다. 그는 절강성 해변에 상륙하여 영파와 항주를 거쳐 혜인사로 정원 스님을 찾아간다.

공부를 마친 그는 고려에 와서 자기에게 가르침을 준 중국인들에게 재물과 불전을 보냈다. 중국인들은 이에 감사를 표하고자 혜인사라는 절 이름을 고려사로 바꾸었다. 그 뒤 의천은 천태종을 창건하고 속장경을 간행하는 등 한국 불교 사상사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고려사는 건륭 당시 터가 아주 넓었고 건물이 아름다웠다. 사방 각처에서 불공을 올리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분향이 가장 성한 절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규식은 모처럼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는 즉시 민필호를 데리고 고려사 옛터를 가서 보았다. 그는 절을 복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있는 것을 수축하고 주변을 정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금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상해에 올 때 가져온 돈은 모두 썼고 동생 건식 편으로 아내 정완이 보낸 돈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사를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폐허처럼 방치된 고국의 자취가 그의 의분을 건드렸던 것이었다.

그는 민제호가 책임을 지고 김태수, 백주원과 함께 공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신규식은 고려사 석 자를 휘호하여 걸었다. 나중 그는 칠언율시를 써서 그 감회를 피력했다.

적산에 해질 무렵 사문을 찾아가니
현회의 서쪽 숲은 골짝 마을 같도다.
천년의 석상은 불조를 우러르고
정처 없는 만릿길 왕손을 울리도다.
사철 향불 피우며 평생 복락을 비니
정갈하고 한결같은 나라혼이 있건만
다만 몹시 어려워 고개 돌려 살피니
가련한 묘당 수 간 말없이 남아 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신규식 #한산사 #유원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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