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등극으로 궐내 입지가 단단해진 혜경궁 홍씨. 드라마 <이산>.
MBC
이런 난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조 시대의 조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비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홍씨의 처우문제를 놓고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의 절충적 방안을 채택했다. 형식적 대우와 실질적 대우를 이원화하는 약간 ‘애매모호한’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형식적 대우는 이랬다. 정조 즉위 이후에 조선정부에서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이면서 그를 왕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남편을 왕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었으니 그 부인도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혜빈 홍씨를 혜경궁으로 높이면서 그를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이미 남편이 죽고 아들이 군주가 된 이후이기 때문에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은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말로 변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형식적으로는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인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중전과 대비의 중간 정도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중전과 대비의 중간? 중전이면 중전이고 대비이면 대비이지 그 중간이 대체 뭐냐며 의문을 품었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관념적인 조치가 일반 백성들에게 쉽게 납득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홍씨에 대한 실질적 대우는 위와 같은 형식적 대우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 대우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장락(長樂)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장락이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한나라 고조 때에 태후(대비)가 장락궁 안에 살았기 때문에 장락이란 표현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그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홍씨를 ‘장락처럼’ 대우했다. ‘대비처럼’ 모신 것이다. 그러므로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호칭으로는 혜경궁 대신 자궁(慈宮)이 사용되었다. 평소에는 그냥 자궁이라고들 불렀다고 한다.
자궁이란 말 속에는 어머니(慈)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궁이란 표현은 실질적으로는 대비를 가리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가 아직 왕으로 추존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대비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궁’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장락처럼’ 즉 ‘대비처럼’ 대하면서 ‘자궁’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시대에 홍씨에 대한 예우는 형식적으로는 ‘대비와 중전의 중간’에서, 실질적으로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한 절충적 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남편이 왕이 아닌데다가 군주의 법적 어머니도 아니었으므로 정식 대비로 대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지존의 생모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대비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비가 아니면서 대비인 존재였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비 대우’ 혹은 ‘대우 대비’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는 훗날 고종 임금에 의해 ‘한 큐’에 해결되었다. 고종 임금이 사도세자를 장조 임금으로 추존하면서 홍씨도 헌경왕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홍씨는 그때서야 비로소 대비가 될 자격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대비가 되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시점이었다. 모두 다 죽은 뒤였기 때문이다.
생전의 그는 그저 ‘대비 대우’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정식 대비는 못 되었다 해도, 아들이 무사히 지존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하며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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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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