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35] 구례 - 매천 황현 (5)

등록 2008.03.25 09:26수정 2008.03.25 11:01
0
원고료로 응원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a

매천 영정 ⓒ 매천기념사업회


명성황후는 비용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그 정가를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민규호는 근민관(近民官)의 관직은 팔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가격이 10,000꾸러미라면 20,000꾸러미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 응모자들은 더욱 경쟁이 심하였고, 그들이 관직을 받으면 백성들에게 착취를 강요하여 백성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민규호는 후회하였다.
- <매천야록> 제1권 갑오이전

이때 초시를 매매하기 시작하여, 그 가격은 200냥에서 300냥으로 동일하지 않았으나 500냥을 호가하면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오년(1894) 이전 두 식년(式年 과거 보는 시기를 정한 해) 동안은 1,000여 냥씩 하였다. 그것은 화폐가 점차 많아지자 화폐 가치도 점차 떨어졌기 때문이다.
 - <매천야록> 제1권 갑오이전

<매천야록> 곳곳에서는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탐학(貪虐 탐욕이 많고 포학함)을 그리고 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국의 징조다. 매천은 조선의 위기가 구미열강과 일본의 침탈에서 비롯된 점도 있지만, 내부 요인이 더 크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정부는 대외 위기를 해결할 만한 능력을 갖추기는커녕, 세도가들의 매관매직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내정조차도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매천은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구례 만수동으로 들어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한일병탄 한 해 전인 1909년 무렵, 매천은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라고 나라 내부의 부패상에 비분강개하였다. 사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이 아닌가. 매천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부정부패를 물리치고 내정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매천은 나라의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책임을 묻고, 후세의 경계로 삼기 위해 역사서 편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국보 제1호가 불타버리는 세태


a

매천 유묵 ⓒ 매천기념사업회


순천대 홍영기 교수와 매천 현손 황승연 선생, 그리고 필자는 매천의 <오하기문>과 <매천야록> 저술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 나누었다. 그런데 일제에서 해방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지난날의 망국 원인인 지도층의 부패와 비리, 관리들의 탐욕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 백성들 스스로가 부패한 인물을 나라의 지도자로 삼는, 그 새 일백년 전 망국의 교훈을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자연스럽게 매천 저서의 원고 원본 이야기로 옮아갔다. 황 선생은 “할아버지가 쓰신 글들이 100년이 지나고 보니 원본 훼손이 매우 염려된다”고 하면서, 원본의 영구 보존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홍 교수는 그 원본의 중요성과 영구 보존방안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하였다. “ <오하기문>과 <매천야록>을 비롯한 매천의 유묵들은 국보급 문화재다. 개인의 소장보다는 국기기관이나 대학 박물관 위탁 소장이 좋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말하면서, 전 광주 MBC 최승효 사장의 일화를 들려 주었다.

순천대 박물관에 소장 중인 한말 의병 유품. 병풍은 전해산 의병장 작전지도다. ⓒ 박도


그분은 그림과 글씨, 고서에 관심이 많아 사비로 문화재 명품들을 많이 구입하여 광주  MBC에 소장하던 중, 1980년 광주  MBC가 불타는 바람에 소중한 문화재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그 이후에 수집한 문화재들은 순천대에 기증하여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필자도 이태 전 순천대 박물관에서 최승효씨가 기증한 의병들의 문헌들을 살펴본 바가 있었다.

a

대담을 마치고 순천역에서(왼쪽부터 황승연 선생, 필자, 홍영기 교수) ⓒ 박도


홍 교수는 우선 하루 빨리 원본 영인본 제작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황 선생은 그 필요성에 공감하였다. 그러면서 몇 해 전 매천 자료 일부를 아무개 대학에 기증하였으나 그 관리가 소홀해서 몹시 속상했다는, 우리 사회의 문화재에 대한 경시 풍조를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라의 문화재를 다루는 장관은 최고의 지성인으로 발탁하여야 함에도, 역대 정권들은 문화의 개념도 모르는 이나 권력의 나팔수로 뽑기가 일수였다. 그러고 보니 재임 중 도박 칩 만들어 팔아먹는 데나, 완장차고 정권 홍위병 노릇에 더 정신을 쏟는 현실이니 국보 제1호조차도 온전할 수 있겠는가. 

마무리 말씀으로 황 선생은 오는 8월 말에 정년퇴직하게 되면 시간을 가지고 집안에서 소장 중인 원본들을 정리한 뒤, 영구 소장 방안을 다각도로 찾아보겠다는 말로 두 시간 가까운 대담을 모두 마쳤다.

나의 다음 답사지가 임실 이석용 의병장이라 순천역에서 남원행 열차를 타고자 나서자 두 분이 배웅해 주셔서 순천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매천의 생애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현 전라남도 과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식마을)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보이자 아버지 시묵(時黙)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여덟 살짜리 꼬마를 구례에 사는 형수 왕씨에게 맡겼다.

구례의 대시인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에 수학시키고자 함이었다. 왕석보는 어린 황현의 시재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황현이 훗날 시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 바탕은 왕석보의 가르침이었다. 청소년기에는 호남의 대유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찾아가 배우기도 하였다. 20대 중반, 황현은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이때 이건창, 강위, 김택영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3년(고종 20),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별시(別試)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 초장에 그의 글이 첫째로 뽑혔다. 하지만 시험관이 황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황현은 조정의 부패가 극심함을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접고 귀향하였다.

a

광양에 있는 매천 생가 안채 ⓒ 박도


1888년(고종 25)에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 무렵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로 청국의 적극 간섭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황현은 다시 부패한 관료사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 만수동으로, 다시 광의면 월곡 마을로 거처를 옮긴 뒤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황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 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역사서를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도 낱낱이 기록하여 준열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황현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그의 절명시 마지막 수에서 “단지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은 아니다(只是成仁不是忠)”라는 말을 남겼다.

a

순절한 구례 대월헌 ⓒ 박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한국사시민강좌 41집의 <황현>, 김준 역 ,매천야록>, 보훈처 공훈록 들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한국사시민강좌 41집의 <황현>, 김준 역 ,매천야록>, 보훈처 공훈록 들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매천 황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