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오마이뉴스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은 서구의 제3세계 강점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이 힘과 문화의 강자와 약자간의 일방적 케이오 게임이었다면, 일본의 한국강점은 다르다.
한일관계는 오히려 전통적으로는 한국이 큰형으로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개화'시켜주었던 관계였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영향으로 서구문명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근세의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마치 마당쇠에게 오히려 사지를 결박당한 주인 신세처럼. 이 말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시키는 일이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화의 힘이 없는 무력으로만의 정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러니 일본의 한국 강점은 일본 측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무력 외엔 한국을 정신문화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본은, 그래서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사로잡아 7번을 놓아주니 그 때서야 복종했다는 교훈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굴복을 받아내지 않고 무력만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계속 억압하고 그 강요된 체제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란 신비한 존재는, 김구 앞에 섰던 윤봉길이나 이봉창처럼, 왜장의 열손가락을 잡고 남강에 투신했던 논개처럼, 거대한 정신을 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저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다.
'조선정신 죽이기' 앞장선 조선사편수회 그래서 일제는 일왕칙령으로 거액의 자금과 고급인력을 대대적으로 동원, 한국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고, 조선인에게 복종을 강조하는 일본 혼을 심어주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즉 황국신민 만들기인 정신개조 작업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심에 걸맞게,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학계의 최고두뇌들을 총동원한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한, 요즈음 말 많은 대운하 프로젝트보다, 더 거대하고 막강한, 일제강점기 최대국가사업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한다. 이 위원회는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민족의 '우수함'을 고취하는 한편 조선인의 열등성·타율성·정체성·사대주의성 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조선전통 민족정신이나 역사의식은 배제하였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왕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하면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 후 총 35권, 전체 2만 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제작하는 데 일본정부의 막대한 자금과 최고 두뇌의 역사학자가 퍼부은 시간은 무려 16년이었다. 그 결과 1932년 일제는 마침 <조선사>를 마친다. 제작비용으로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는 이렇게 일왕명령으로 만들어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직접관리, 운용됐던 당시 일제의 "조선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국가사업이었다.
일본은 현명하게도 조선인을 무력으로 굴종시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일환으로 이렇게 한국사를 대폭 축소하고, 한민족의 역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항상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연속이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를 당쟁으로 얼룩진 부패한 역사로 규정지으며 일본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내세운다.
역사학계를 좌우한 '친일식민사관'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