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진짜 길 물어본 거였잖아!"

거리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로 인한 생활의 변화

등록 2008.04.02 09:56수정 2008.04.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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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좀 물어 볼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헤매고 있는 듯 나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 사람의 심정을 알기에 정성껏 설명해준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그 사람은 사라진다. 왠지 모르게 뿌듯해진다.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중 선택받았다는 기쁨, 작지만 꼭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는 대견함. 괜스레 내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아챈다. "길 좀 물어 볼게요. 터미널이 어디죠?" 수수한 옷차림에 비해 화장이 짙은 아주머니셨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길을 몰라 많이 답답했겠지.' 좋게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터미널 앞에서 터미널이 어디냐고 묻다니?' 나는 당황해서 여기가 터미널이라고 말씀드렸다. 갑자기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더니 더 황당한 말을 꺼냈다. "집에 화가 있어서 학생이 굿을 하지 않으면 집안이 망해. 내가 잘 아는 신령님 소개해줄게. 차 한 잔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순간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도망치듯 뛰어서 버스에 올랐다. 여전히 아주머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내 등 뒤에서 소리치고 계셨다.

 

그 이후에도 서너 번 그 아주머니 비슷한 분과 마주쳤고, 여전히 굿을 해야 한다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점점 길을 알려주며 느꼈던 그 기쁨을 잊어갔다. 도대체 그 아주머니는 길이 궁금한 것일까, 내 가족의 앞날이 궁금한 것일까. 길을 물어오면 피하는 것이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 날도 그 자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법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요." 멀리 법원을 향해 대충 손가락을 가리키고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려는 순간 들려오는 한 마디. "네, 고마워요."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번엔 진짜였잖아!' 너무 죄송해서 뒤따라가 다시 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집에 와서 엄마께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세상이 그런 걸 어쩔 수 없잖아.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해한다고 하셨다. 그 이름 모를 종교의 아주머니가 점점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친절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귀를 기울이게 하고 이용하려 하다니. 무엇보다 길을 물어오는 사람을 점점 피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나에게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그것을 악용한 일부였을 뿐이다. 그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판단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불쾌함을 주었다. 길을 물어보고 알려주는 낯선 두 사람의 대화.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정겨움이 좋았다. 그런데 난 그 정을 막고 돌아서 버린 것이 아닌가. 게다가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았으니.

 

나는 이제 피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친절해지기로 했다. 길을 알려주며 살짝 웃어줄 수 있는 따뜻함을 가지기로 했다. 혹시 그 종교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그땐 죄송하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 길을 정말 모르는 사람에게는 친절함과 정으로 안내해줘야겠다. 돌아서면 미소가 지어지는 그 때의 뿌듯함이 그립다.

2008.04.02 09:56ⓒ 2008 OhmyNews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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