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등록 2008.04.03 10:25수정 2008.04.0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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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는 누구인가
 
1922년 포르투갈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학업을 포기하고 용접공이 된 주제 사라마구. 우익 독재정권의 폭압에 괴로워했던 그는 열렬한 공산당원이었고 반정부 운동으로 인하여 후일 조국에서 추방까지 당하고 만다. 용접공뿐 아니라 제철공, 정비공, 막일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스물다섯 살 때 <죄악의 땅>으로 데뷔했지만 작가보다는 공산주의 활동에 힘쓰며 살았다.
 
사라마구가 비로소 문단의 세계적인 관심을 얻게 된 계기는 환갑이란 늦은 나이에 <수도원의 비망록>를 발표하면서다. 이때부터 그는 유럽 최고의 작가로 주목받았으며 실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문학으로 세상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흔히 최고의 영광이라 하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올랐으며, 포르투갈어권 최고 업적의 작가에게 주는 까몽이스 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사라마구는 한편으로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가장 '불온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특히 신성성을 철저하게 해체시킨 <예수의 제 2복음>으로 종교계의 엄청난 반발을 받았다. 최근에는 포르투갈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반정부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포르투갈 문학을 대표하는 굳센 지식인이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제 사라마구가 1995년 발표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알베르 까뮈의 유명한 고전 <페스트>와 곧잘 비교되지만, 그보다 훨씬 오락적이고 판타지적인 소설이다. 사라마구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아예 문장 부호를 완전히 무시하고 쌩쌩 내달린다. 문단의 구분이 매우 드물고 글자가 페이지를 꽉꽉 채우고 있다. 한편의 스릴러 소설로 읽어도 좋을 만큼 밀도 높은 공포가 자리한다.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운전자의 눈이 갑자기 멀어버린다. "눈이 안 보여." 눈앞이 검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온통 하얗게 안 보인다. 실명(失明)은 마치 전염병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른다. 전례 없는 백색공포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보이는 이는 오직 한 사람, 의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벌어지는 혁명적인 변화를 똑똑히 목도한다.
 
'눈이 멀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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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 해냄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 해냄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눈이 멀어버린다. 그렇다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르크스는 일찍이 "인간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질적 사회구조가 인간의 정신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컴퓨터, 백화점, 빌딩, 자동차 따위의 사회 양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하지만 한순간에 눈이 멀어버려서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눈먼 자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물질적 소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 존재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소비를 끊임없이 거듭하며 존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명'은 단순히 육체의 실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눈먼 자들의 시야는 온통 하얗게 보인다. 그처럼 이들의 존재는 완전한 백지 상태가 되었다. 기존 물질적 소비사회에 의존하던 존재는 소멸했고, 이제 눈먼 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마치 태초의 인간처럼.
 
눈먼 자들만이 보는 것
 
그러나 눈먼 자들만이 보는 것들이 있다. 눈먼 자들은 따로 격리되고 총살하는 외부의 폭력은 물론이고 이기주의, 계급화, 조직폭력 등 내부의 야만을 함께 겪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곧 이러한 폭력과 야만이 전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는 걸 발견한다. 이것들 모두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버젓하게 존재했던 모습들이다.
 
눈먼 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옛날 사회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던 비인간성을 인식하게 된다. 눈이 보였을 때는 오히려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현대사회의 비인간성을 눈감고 무시했다. 의사와 아내의 대화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란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현실로 돌아와 우리도 혹시 눈이 멀어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일이다.
 
세상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지 않도록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백색공포' 분위기로 일관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마음 따스해지는 희망은 있다. 인간성이 온전한 사람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홀로 눈이 멀지 않았다. 바로 의사의 아내다. 그녀는 이기심과 폭력이 지배하는 수용소 안에서 남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을 행하는 참된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희망을 배우고 사랑을 배운다.
 
그녀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는 참된 세상의, 참된 사람이다. 세상에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될 소중한 '인간적 가치'들이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오면서 인간적 가치마저 물질적으로 해석하고 계산한다. 점점 험악해지는 세상은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다.
 
그러니 세상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점점 심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 가치는 더욱 위협받고 있다. 이제 사회적 계급을 넘어서 연대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일상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 실천할 인간적 양심이 절박한 때이다.

덧붙이는 글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9500원

2008.04.03 10:2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9500원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2002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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