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락산은 우리나라 산의 미래다

충남 금산 진락산 (進樂山. ·737m) 등반기

등록 2008.04.04 18:02수정 2008.04.0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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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끝내고 음지리 쪽에서 바라본 진락산. 석동리에서 올라와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서 산행. ⓒ 안병기


진락산(737m)은 충남 금산군 금산읍 남이면에서 시작해 남서로 길게 뻗어 있는 금산의 진산이다. 높이로만 따지면 서대산(903.7m), 대둔산(877.7m), 계룡산(845.1m)에 이어서 충남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산은 진악산(進樂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진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樂'이라는 한자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의 의미에 따른 호응 관계로 보면 '락'으로 읽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보석사를 나와 산행을 서두른다. 은행나무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철이었다면 약간 지리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그러나 산내 암자인 영천암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2월 중순, 지리산 삼정산 등반 때 다쳤던 다리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겉으로는 다 나은 것 같지만 산을 오르다 보면 다시 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이 과정 중 마지막 단계에 이른 진락산의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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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갈참나무 등이 잠식한 숲의 식생. ⓒ 안병기


아직 참새 혀만 한 조붓한 이파리도 한 잎 돋아나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 평지엔 벚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이곳 진락산 자락엔 아직 봄이 무르익지 않은 것이다. 몇 년 전이었던가. 진락산 앞쪽, 중턱에 있는 한 암자에서 잤던 하룻밤이 떠오른다. 7월 초였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이불을 덮고도 오들오들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저기 생강나무 꽃이 피어 있다. 단독으로 개화한 생강나무 꽃이 더욱 어여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숲에서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온통 참나뭇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인 신갈나무 뿐이다. 높이 약 30m까지 자라는 신갈나무는 참나무류 가운데에선 가장 높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락산은 천이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침엽수인 소나무 숲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 활엽수인 참나무 숲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숲의 천이라고 부른다. 이 신갈나무는 숲의 천이 과정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극상을 이루는 나무다. '극상'이란 안정된 숲을 이뤘다는 뜻이다.

어쩌면 진락산의 식생은 우리나라 산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마치 아열대성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침엽수가 사라지게 될 미래의 우리나라 숲을 보는 것 같다. 활엽수는 침엽수보다 훨씬 성장 속도가 빨라 순식간에 숲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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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락산에서 만난 식생. 좌로부터 생강나무 꽃·노랑제비꽃·도마뱀 순이다. ⓒ 안병기


양지바른 언덕바지에 무리지어 핀 노랑제비꽃이 반갑다. 제비꽃과에 속하는 노랑제비꽃은
다년생 초본 식물이다.

녹나뭇과에 속하는 생강나무는 아귀나무·동백나무·개동백나무 등 별칭이 많다. 새로 잘라 낸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나므로 생강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등장하는 동백꽃이 빨갛게 피는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 노란 꽃이라는 건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됐다.

바위 틈에 앉아 잠시 쉬다가 바위틈에서 올라온 도마뱀과 만난다. 도마뱀과에 속하는 파충류인 도마뱀은 산속 풀밭에 살면서 곤충·지렁이 따위를 잡아먹고 사는 녀석이다. 위험에 부딪히면 꼬리를 흔들어 적의 신경을 분산시킨 다음 꼬리를 자르고 나서 쏜살같이 도망쳐 버린다. 그러나 내가 만난 녀석은 도망은커녕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천성이 게으른 녀석인지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겠다는 건지 알쏭달쏭하다.

나무판에 적힌 시는 바위를 노래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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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통바위. ⓒ 안병기


이윽고 첫 번째 도구통바위가 있는 고개에 도착한다. 이정표가 맞다면 보석사에서 2.1km 올라온 지점이다. 도구통은 절구통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바위가 정말 도구통 같이 생겼는지 살펴보지만, 감각이 무딘 탓인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 개인적으로 보면 차라리 망부석이라 이름 붙였으면 좋을 것 같다. 뭔가를 굽어보는 듯한 표정이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바위 옆에 서 있는 나무판에는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되는 청마 유치진의 시 '바위'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다른 지방 시인들의 시를 새겨 놓기도 했지만, 안용산 등 '좌도시' 동인들의 시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이 좌도시 동인들의 시는 우리 시대의 가객이라 부르는 장사익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되고 있기도 하다.

지나온 길에도 이따금 시를 적어 놓은 나무판이 눈에 띄긴 했지만, 내 감수성을 흔들어 깨우진 못했다. 너무 흔하면 가치를 잃기 십상이다. 시를 적은 나무판들이 저 '바위'라는 시를 읽기도 전에 나를 이미 "애련에 물들지 않는" 바위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부터 능선길이다. 이정표는 정상까지 2.3km 남았다고 일러준다.

 산을 오르는 것은 정신의 청량함을 맛보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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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봉(737m)서 비라본 남쪽의 산 봉우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실루엣.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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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상봉(737m). 저 봉우리가 실질적인 진락산의 정상이다. ⓒ 안병기


될수록 천천히 걸어간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봉우리들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이제 막 눈 뜨기 시작하는 나무와도 눈을 맞추면서 걸어간다. 서두를 게 무엇 있는가. 날이 저물면 못다 간 길은 남겨둔 채 내려가면 되고, 숨이 차면 쉬어가면 된다. 등산은 꼭 목표지점에 도착해야 하는 경기가 아니다.

완만한 능선 길을 바람만 바람만 따라가다가 갑자기 가파른 길을 만난다. 숨을 할딱이며 길을 올라 마침내 사방이 탁 트인 봉우리에 올라선다. 지도를 보니, 아마도 이곳이 진락산의 실제 정상인 737m봉인 모양이다. 

남쪽을 바라보니, 눈앞에 수많은 연봉들이 파도처럼 펼쳐진다. 시계가 별로 맑지 않아 딱히 어느 산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장엄하기 짝이 없다. 이 맛을 보려고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땀을 닦아 주는 한 줄기 산들바람, 한 모금의 시원한 약수, 그리고 저 장엄한 산줄기가 주는 시원함이 우리가 애써 산을 오르는 이유의 전부인 셈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을 오르는 것은 정신의 청량함을 맛보려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 봉우리엔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었다고 해서 잠시 둘러보았지만,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정상 아닌 정상에 서 있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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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진 바위를 지나가야 하는 암릉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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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락산 정상. ⓒ 안병기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까진 1.3km 정도 더 가야 한다. 서서히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금산 쪽으론 더욱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로 돼 있다. 좁은 암릉길을 지나갈 때는 마치 공중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암릉길은 자칫 긴장을 풀면 미끄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지나간다.

이윽고 정상 표지석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732m 봉우리에 도착한다. 진락산의 정상이 잘못 표기된 이유 중 하나는 금산읍에서 바라볼 때 737m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특이한 지형 때문에 737m봉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전 지식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도 좀 전에 지나왔던 봉우리가 진짜 정상이었다는 걸 알지 못 했을 것이다.

이곳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십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바라만 봐도 아찔할 지경이다. 산에 둘러싸인 낮은 분지에 들어앉은 금산 읍내가 마치 요람 안에 든 아이처럼 얌전히 잠들어 있다. 앞으로 가야할 북서쪽 능선을 바라보니, 그곳 역시 만만치 않은 산세를 지니고 있다. 쉴 만큼 쉬었으니 또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이정표는 광장까지 3.4m 남았다고 알려준다.

흐르는 물처럼 언젠가 다시 너를 찾아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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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처럼 생겼다는 빈대바위. 산 아래 까맣게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삼포들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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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넘어재를 지키는 장승. ⓒ 안병기


조금 아래로 내려서자, 우뚝 솟은 바위가 나온다. 빈대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빈대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다. 바위에 올라서니, 정말 장관이다. 특히 금산읍 근방에 까만 바둑알처럼 산재한 인삼밭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왜 금산이 인삼의 고장인지 알 것 같다.

능선길에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아직 활엽수들이 산 꼭대기까지는 잠식하지 못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아까보다는 훨씬 편안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그리 넓지 않은 공터가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이 안부가 바로 실제 수리넘어재이다. 옛 금산읍내와 남쪽 마을을 연결했던 길목이다. "그 옛날 울고 넘었던 수리넘어재"는 이제 등산객들의 산행 기점이 되어 있다. 2기의 장승이 날리는 허허로운 웃음을 뒤로 한 채 산길을 내려선다. 음지리 쪽으로 하산하기 위해 고개를 내려서자, 노랫말이 새겨진 까만 비석이 서 있다.

옛날 옛날부터 수천 년 동안을/ 진악산 너머 두메산골에서/ 고생고생하며 살았던 사람아/  먹고 살기 위해 무거운 나뭇짐/ 산나물 보따리 몸에다 이고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험한 재 넘을 적에 피땀과 피눈물을/ 그 얼마나 많이 흘렸던가요 (이하생략) 

그 옛날 나뭇꾼들이 부르던 신세타령인 지게 '어사용'을 적어 놓은 게 아닐까 싶다. 작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수도없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을 나무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고1 때까지 나무꾼 노릇을 톡톡히 해야 했던 내겐 울컥 그리움마저 불어올 듯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음지리 마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락산을 올려다본다. "산은 물을 안아주지만 물은 산을 버리고 갈 뿐'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늘 하루. 난 너를 휘감아돌던 한 줄기 물길이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흐르는 물처럼 다시 너를 찾아을 것이다. 잘 있거라, 오늘 내게 많은 기쁨을 안겨주었던 진락산이여.
#충남 #금산 #진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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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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