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 그윽한 풍경 소리에 마음을 씻고

충남 금산 진락산 영천암

등록 2008.04.06 18:19수정 2008.04.06 21:26
0
원고료로 응원
a

영천암 가는 길. ⓒ 안병기

영천암 가는 길. ⓒ 안병기
영천암으로 가는 길이다. 영천암은 진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암자로 가는 길은 꾸불꾸불 길다. 마치 땅에 누운 아지랑이 같이 아른거리는 길이다. 아마도 멀리서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나 역시 한 줄기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릴 것이다.
 
엊그제, 눈보라 칠 땐 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성큼 우리 옆에 와 있는 봄. 무상(無常)이란 그런 것이다. 머무름도 없고, 떠남도 없는 것. 길가에는 장승 2기가 서 있다. 저들의 연기(緣起)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아주 어린나무에서 출발해서 저렇게 장승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삶의 희로애락을 견디었을까. 어쩌면 나의 전생은 저 장승이 아직 한 그루 나무였던 시절, 그 가지 위에 깃들던 한 줄기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길이 점점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다람쥐 한 마리가 길가로 뛰쳐나온다. 녀석의 존재가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왜 산길에서 다람쥐를 만나면 반가운 걸까. 우린 멀고 먼 어린 시절부터 숨바꼭질 동무였다. 원 녀석도. 너 지금 내게 숨바꼭질을 하자는 거로구나. 미안하다,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구나.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다람쥐는 금세 근처 바위틈 속으로 숨어 버린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오릿길도 금방이다. 마침내 영천암 입구에 도착했다.
 
a

영천암 전경. ⓒ 안병기

영천암 전경. ⓒ 안병기
눈앞에 바라다 이는 높다란 축대. 산지형 가람이 가진 전형적인 형태다. 그렇지만, 영천암의 축대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돌을 이곳까지 날라와서 축대를 쌓았을까. 축대 아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암자로 올라간다. 이윽고 천 년 세월을 견뎌온 영천암의 측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천암은 단 두 채의 건물뿐인 조촐하고 고즈넉한 암자였다.
 
영천암의 역사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저 아래에 있는 보석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신라 헌강왕 12년(88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믿을 건 못 된다. 암자 이름은 암자 뒤에서 솟아나는 석간수가 병자에게 특효가 있는 영험한 샘이라 하여 영천암이라는 했다는 것.
 
조선시대 인법당 건축물에 대한 소중한 자료
 
a

인법당인 무량수각. ⓒ 안병기

인법당인 무량수각. ⓒ 안병기
 
a

영천암 현판. ⓒ 안병기

영천암 현판. ⓒ 안병기
 
보석사의 산내 암자이다. 그러나 영천암은 오랜 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스님들이 기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스님들이 다시 거주하면서 기왕에 있던 법당 건물인 무량수각을 수리한 것이 1999년의 일이었다. 무량수각을 수리할 때, "1786년(건륭51)에 화주승 법성 등에 의해 지어졌다"라는 내용이 적힌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그로 미루어 보면 영천암은 한동안 폐사돼 있었으리라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정면 6칸, 측면은 3칸 크기의 법당은 요사와 법당이 한 건물에 포함되어 있는 인법당 형태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인법당 형식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져 남아 있는 건물이 별로 없다. 3월 초에 다녀온 해인사 홍제암 건물이 보물 1300호로 로 지정된 이유가 그것이다.
 
영천암 무량수각은 아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익공계의 건물구조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법당 건축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툇마루 위 처마 아래에는'영천암'이라는 현판과 '무량수각'이라고 쓴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천암이라는 현판 끝에는 '금산(錦山) 12세 신동 고금석(高錦石) 서'라고 부기돼 있다. 만일 저 글씨를 12살 어린 아이가 쓴 게 맞다면 참으로 엄청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아이는 현재 몇 살이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네 꽉 막힌 삶에 숨통을 트게 해주는 조그만 여유
 
a

기둥에 걸린 목탁과 부엌 문고리에 걸린 숟가락. ⓒ 안병기

기둥에 걸린 목탁과 부엌 문고리에 걸린 숟가락. ⓒ 안병기
 
정면 6칸 중에서 좌측 2칸은 부엌이며, 중앙의 3칸은 법당,  우측에 있는 한 칸은 방이다. 건물 정면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다. 법당과 방을 신발을 신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연결한 것이다. 무량수각의 좌측 북쪽에는 2칸의 방이 있다. 1999년에 무량수각을 중수할 때 달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법당 안엔 감실 형태의 불단이 있고 그 위에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는 아미타불 탱화가 걸려있다. 인법당 좌측 부엌문에는 수저 한 가락이 걸려 있다. 자물쇠 대신 찔러 놓은 모양이다.
 
어릴 적, 시골에 살 적에 나도 저렇게 숟가락으로 부엌문을 걸어 잠그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굳이 튼튼한 자물쇠로 채워놓지 않아도 되는 여유. 그런 여유가 우리네 꽉 막힌 삶에 숨통을 트게 해준다.
 
a

칠성각. ⓒ 안병기

칠성각. ⓒ 안병기
 
인법당 죄측엔 칠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자그마한 전각이다. 칠성은 원래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불교가 토착신앙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절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빈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파군성을 칠성이라고 한다. 칠성각의 주존은 치성광여래이다.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이 치성광여래이다. 칠성각 안 중앙에는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왼편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의 모습이 그려진 산신탱화가 걸려 있다.
 
칠성각 뒤편으로 올라가면 암굴 속에서 솟아나는 영천이라는 샘이 있다. 이 암자의 존재 이유가 되고, 이 암자를 지탱해주는 샘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현재 샘은 유리로 덮여 있다. 하릴없이 그냥 칠성각으로 내려온다. 이대로 떠나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어  칠성각 기둥에 걸린 4개의 주련을 읽어본다.
 
고성흥비작칠성(古聖興悲作七星) 옛날에 성인이 자비를 일으켜 칠성을 만드니
인간수복각사동(人間壽福各司同) 인간의 목숨과 복을 맡아 서로 같게 하셨다
수연부감여월인(隨緣赴感如月印) 인연을 따라 감응하심이 월인(月印)과 같고
공계순환제유정(空界循還濟有情) 공계를 돌고 돌아 중생(有情)을 구제하신다
 
남은 생도 딱딱하지 않은 가슴으로 살았으면
 
a

법당 추녀 끝에 달린 풍경. ⓒ 안병기

법당 추녀 끝에 달린 풍경. ⓒ 안병기
이제 영천암을 떠날 시간이다. 내 떠남을 바람이 눈치챈 것일까. 법당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을 울어준다. 바라보니, 꽤 큰 물고기를 단 풍경이다. 물고기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듯 그렇게 쉬지 말고 수행에 힘쓰라는 뜻이다.
 
이따금 풍경이 우는 것은 "너, 지금 딴 짓 하고 있지 않으냐?"라는 일종의 경책이다. 그러나 그 나무람은 무지막지하지 않다. 마음 상하지 않게 은근히 꾸짖는 것이다. 아, 나도 저런 소리 하나 마음에 넣어두고 살고 싶다.  이내 풍경 소리가 그치고 다시 고요와 적막에 잠긴다.
 
이제 영천암을 떠날 시간이다. 길을 내려오다가 축대에 차곡차곡 쌓인 돌들에 눈인사를 보낸다. 어쩌면 돌이 저토록 딱딱한 것은 소리를 간직할 가슴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생도 부디 딱딱하지 않은 가슴으로 살아가기를. 
2008.04.06 18:19 ⓒ 2008 OhmyNews
#금산 #진락산 #영천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5. 5 내 차 박은 덤프트럭... 운전자 보고 깜짝 놀란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