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로 첫 출근하는 딸을 배웅하고서...

아침 출근길이 아이들 만날 기쁨으로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등록 2008.04.14 14:28수정 2008.04.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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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이 오늘 첫 출근을 했습니다. 연초에 근소한 차이로 교사 임용시험에 낙방하고는 '기간제' 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리를 찾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올해부터 경기도 임용시험에도 현장실습을 포함한다고 하니 딸내미는 내내 불안해했습니다. 어느 학교든 경력자를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경력 쌓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초보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입니다. 양편 다 이해는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에 경력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하지만 서툴더라도 초보자는 열정과 의욕이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할 수 없이 제가 나섰습니다. 마침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함께 근무했던 당시 교감 선생님께서 지금 학교장으로 계십니다. 단도직입으로 우리 아이 좀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화력이 좋으시고 한 번 맺은 인연이라면 누구에게든 최선을 다하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용기 낼 수 있었을 겁니다.

마침 4월 중순부터 3개월 산가 들어가는 국어 선생님이 계신다면서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 후, 하루하루 아이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이날을 기다려왔는데 막상 코앞에 닥치니 두려움이 앞서는가 봅니다. 처음엔 누구나 떨리고 두렵다며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이 순간도 지나갈 뿐이라고.'

학교 첫 출근을 앞두고 잠을 설쳐대던 때가 생각납니다. 교생 실습 후로는 교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면서 궁핍하게 살다 보니 곧 후회가 되었지만 당장 어찌해볼 수 없이 떠밀려왔습니다. 애를 맡길 곳도 없을뿐더러, 시험 준비할 여건은 안 되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는 만 40세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시도조차 못 하고 말았습니다.

기회는 우연히 왔습니다. 딸내미 중3 때의 담임선생님이 한문 담당이었습니다. 전공이 같은 선생님께 친밀감을 느꼈던지 내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원자격증은 있는데 교직으로 나가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딸이 고교로 진학하면서 담임선생님도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딸내미 모교는 그 선생님 후임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가 미발령이어서 계약직이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저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제의가 왔을 때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해보겠다는 대답부터 튀어나왔습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으니까요. IMF 후유증은 질기도록 오래 끌었습니다.

출근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웬만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출근 전날 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깼습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때까지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작은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틈틈이 통신대도 편입해 졸업하고 도서관 들락거리며 학습욕구를 채워나갔고, 어머니 교실이나 방과 후 교실에서 수업도 해봤는데 뭐가 두려워? 가까스로 생긴 자신감이 어느 순간엔 도로 위축되곤 했습니다. 결국은 부딪쳐봐야 마무리되는 감정인 것을….


딸의 모교로 출근하다 보니 가끔은 재미있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웃해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학부형들이 교무실에서 저를 만나고는 깜짝 놀라곤 합니다. 심지어 어느 지인은 내가 학교에 취직했다니 급식소에 들어간 줄 알았다면서 아니?!! 정말?!! 그러기도 했습니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 딸내미는 엄마 첫 출근 때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이제 생각하니 참 미안하다고 하네요. 그때는 철이 없어 엄마가 선생님으로 학교 가는 게 좋았고 돈 벌어올 일만 좋았다나요.

이후로도 귀한 인연들을 만나 여러 해 자리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집안 형편도 좀 나아졌습니다. 결코 잊지 못할 은인, 아이 중3 때의 담임선생님을 작년에 찾아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요. 대접하고 싶었던 점심도 가로채이고 말았습니다. 찾아준 것만도 고맙다면서.

"싫어요, 싫어요! 오늘은 제가 낼 거예요."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여태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딸내미가 꼭 시험 합격하고 찾아가겠다고 해서입니다. 그때 딸에게 그러더랍니다. 너희 엄마가 어째 나를 여태 기억하시느냐며 놀랍다고. 크게 베풀고도 곧 잊어버릴 선생님, 정말 닮고 싶은 교사상이었음에도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훌쩍 지나버렸지만, 남의 자식들도 다 예뻐 보일 나이에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이 퍽 다행이었습니다.

지금쯤 딸내미는 어떻게 수업하고 있을지, 제발 아이들이 잘 도와주길 바랍니다. 대범한 척하면서도 수줍음이 많아 얼굴도 잘 붉히는데 아이들이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어서 두려움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다만 익숙해질 때는 그 마음을 경계하여 타성에 빠지지 말고 첫 출근 때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의 실수는 금방 잊고 고운 마음을 오래 기억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아침 출근길이 아이들 만날 기쁨으로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첫출근 #기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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