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프 운하 초기 계획도. 프러시아가 점령한 북부 지역을 지나 라트비아 해안에 도달하고자 한 대규모 공사였으나 중간 단계에서 공사가 멈췄다.
서진석
운하 사업은 초기에는 프러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831년 11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난 반러시아 봉기 후 공사가 중지되고 이미 건설된 구간이 파괴됐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839년 폴란드의 나레브강에서 벨로루시의 니에멘강을 연결하는 수준에서 공사는 마무리됐다.
애초 계획과 달리 바다에 닿지도 못하고 내륙의 호수 등만 연결한 애매한 상태였다. 공사 시작 2년 후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그단스크의 관세를 낮추는 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트비아까지 연결하려던 방안도 실행되지 못하고, 폴란드와 벨로루시 구간에서만 공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운하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부터, 본래 의도했던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규모 바지선은 운항되지 않았고, 화물 대량 운송은 실현되지 않았다.
공사 기간 16년... 그러나 바다에 닿지도, 화물선 다니지도 못한 말뿐인 운하경제적 목적으로 활용된 경우는 이따금 주변의 목재를 뗏목처럼 묶어 띄워 하류로 보내거나(1990년 이후엔 이마저도 사라졌다), 소규모 관광용 유람선 혹은 개인 소유 모터보트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정도였다.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운하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처음부터 물자를 실어 나르는 운하 본연의 기능과는 거리가 먼 셈이었다.
아우구스투프 운하엔 18개의 갑문이 있다(폴란드에 14개, 벨로루시에 4개). 폴란드의 14개 갑문(이 중 2개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중 11개는 19세기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현대화와 자동화를 위한 개조 없이 19세기 방식대로 운영되고 있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갑문에 상주하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갑문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나머지 3개는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의 진입로를 차단하고자 한 독일군에게 파괴돼, 전후에 복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