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버트란트 러셀이 안 나오는 '이유'

교과부의 '학교 자율화 계획'을 접하고...

등록 2008.04.17 17:40수정 2008.04.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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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트 러셀은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이다. 그는 일급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20세기 논리학·수학 근본혁명을 이끈 선구자요, 80노구에도 반전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회사상가였다. 그는 수학으로 학위를 받은 수학자였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프레게의 수리철학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시대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었다. 

분석철학을 전공한 그는 개념적 엄밀함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난마처럼 얽힌 정성적 지식의 혼란을 정량적 논리로 재구성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즉 그는 애매한 산문적 지식들을 가지고 몽상적인 소리만 하는 흔해빠진 자유주의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그도 학창 시절 시험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가 다녔던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수학과목에 대하여 연말마다 능력시험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이 시험때문에 크게 고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호기심이 아닌 외부적 강제에 의한 지식의 습득에 크게 괴로웠던 기억을 술회한다. 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버트란트 러셀의 분석철학은 개미눈꼽만한 논리의 모순까지도 파고들어 논리의 토대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철학 강의시간에 칠판에 쓰여지는 것은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백가쟁명의 이론들이 아니라 비전문가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난해하고 딱딱한 수식과 기호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시제도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들이 바로 이런 딱딱한 논리와 수리적 엄밀함들이다.

이것들은 점수화 하기도 쉬울뿐더러 개인의 정량적 지능을 재는 가장 원초적인 잣대이기 때문이다. 영어와 함께 수학이 가장 중시되는 이유는 이것이다. 어려운 수학기호는 우리 학생들에게 입시지옥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버트런트 러셀에게 그런 엄밀한 개념들은 이 세계에 대한 근원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질료들에 불과했다.

모든 창조적 지식들은 이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강제로 주입될때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발적 호기심과 욕구에 의해 습득될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 뉴턴의 미적분학은 의욕없는 비전문가에게 고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과학에 흥미를 가진 일정수준 이상의 지능과 적성을 가진 학생에게는 기쁨에 취해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창조적인 개념적 지식은 결국 자발적 지적 욕구에 의해 달성된다. 강제가 개입될 틈은 없다.

우리 아이들처럼 하루 15시간의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고도 선진국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선진국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의 일정한 과학적, 공학적, 사회과학적 지식들을 확대재생산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은 적절한 양의 지적 입력만 가해지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지적 욕구와 에너지에 의해 고급의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한다.


즉 우리가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그 공부 노동은 대다수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실용적이지도 않으며 경제적이지도 않고 문화적이지도 않고 인권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무의미한 노동을 강제로 시키는것과 같다.

아이들을 강제 공부에 몰두하게 하는 일은 비인권적인데다 비효율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의 하나다. 이것은 교육학이 아닌 문화인류학적 탐구의 대상이라고 할수 있다. 왜 남한 국민들은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단지 13~18세의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의미만을 갖는 괴상한 의식을 반복하는 것인가? 공부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대학입시를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과도한 공부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남들보다 1점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물론 청소년에게는 앞으로 대학 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또 직업인으로서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습득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을 하루 8시간 범위내에서 그냥 좋게 가르치면 된다. 나머지 시간은 아이들의 다양한 분야의 인격발달에 필요한 취미와 활동을 하는데 쓰여지면 된다.

그리고 시험은 특출나게 무엇을 잘하는 아이들을 뽑는 역할을 해야한다. 1점 단위로 전국 등수를 매기는 야만적 짓거리를 할게 아니라. 버트런트 러셀같은 분석(수리)철학자 조차도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온다. '수학의 정석'따위보다는 1000조배 더 난해하고 엄밀한 학문적인 일을 하는데 필요한것은 자연적 호기심과 재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엄밀한 학문도 이랬다면 그보다 더 말랑말랑한 나머지 학문들이야 말 할것도 없다. 기계에 관심있는 아이들, 문학에 관심있는 아이들, 수학에 관심있는 아이들, 사회에 관심있는 아이들, 예술에 관심있는 아이들이 자기가 못하는 과목의 점수를 올려서 더 나은 급간에 자신을 위치시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을 가려는 노력을 하는대신 그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더 집중적으로 할수 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것은 무슨 대단한 투자도 아니다. 그저 학교는 8시간 범위내에서 기본적인 교과목들을 그냥 가르치고 엄밀한 시험평정만 포기하면 된다.

나머지 자유시간에 아이들은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계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제2의 러셀이 될 것이고 아인슈타인이 될 것이고 에디슨이 될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환경에서 진정 엄밀하고 난해하고 '실용적인'학문이 꽃피는 것이다. 지금의 억압적인 입시 환경에서 배출되는 학생들은 현대 산업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 재생산할 능력과 의욕을 상당수 잃어버린 말라 비틀어진 배추같은 꼴을 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무슨 좌파 사상가들이 읊조리는 "자유와 창의" "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학생이 아니라 실제로 일정수준이상의 개념적 지식을 소화하고 적용할만한 능력을 상실한 무능력자가 되어 세계와의 지식경쟁에서 비참하게 패하는 언더독들이 될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학교 자율화"조치는 이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입시 경제에 기생하는 사교육 시장을 더 팽창시킬 것이다.  
#교육 #자율화 #입시 #공부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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