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지 증후군', 우리 부부는 이렇게 극복했다

돈 달라는 아이들 있을 때가 행복하다지만...

등록 2008.04.21 20:46수정 2008.04.2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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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데? 뭔데?" 그러면서 서양 제비꽃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보는 것 같다.
"뭔데? 뭔데?" 그러면서 서양 제비꽃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보는 것 같다.김진원

지난 겨울 어느 날, 목욕탕에서 옆집 아줌마를 만났다. 뜨뜻한 온탕에 들어가서 목까지 몸을 담그고 있는데 아줌마가 물었다.


"영준이 합격했어?"
"네, 그런데 입학금이 오백만 원이 넘어요. 애 둘 등록금 합치면 천만 원도 넘는데, 거기다 방 얻어줘야 되니…. 돈 감당을 못하겠어요."
"그러게. 방값 비싸지?"
"학교 앞 원룸들 가격이 장난이 아니에요. 우린 투룸을 얻어야 되니, 보증금에다 월세까지 다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어요."

"돈 달라는 아이들 있을 때가 행복할 때야"

대학생인 아이들 학비를 걱정하는 내게 옆집 아줌마가 그랬다.

"그래도 그때가 좋은 거야. 자식들이 돈 달라, 그럴 때가 제일로 좋을 때야. 그러니 행복하다 생각해라. 아이들 다 나가 봐라 사는 재미가 없다. 우린 그냥 산다. 자식들 다 시집 보내고 나니 재미있는 게 없다."

정말 그럴까? 아저씨랑 아줌마가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것 같던데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뭐 여행도 자주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사시면서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내 보기에는 아줌마가 제일 편하고 부럽더라만은…."
"아냐, 여행 가봤자 그저 그래. 여행도 힘 좋을 때 다녀야지 우리 나이 되면 다 그저 그래. 아이들이랑 지지고 볶고 할 때가 제일 좋은 거야."

그때만 해도 아줌마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내 옆에는 고등학생인 아들이 있었고 방학을 한 딸이 집에 와 있었으므로 외롭다거나 허전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떠나버리자 집이 빈둥지처럼 느껴져

 산제비꽃인가요? 제 눈에는 옹알이하는 아기같이 고와 보입니다.
산제비꽃인가요? 제 눈에는 옹알이하는 아기같이 고와 보입니다.김진원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졌다. 아들과 딸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4 식구는 지금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두 아이가 살 집을 구하고 아이들이 살 수 있도록 가구며 집기들을 사들이고 꾸며줄 때까지는 참 재미있었다. 마치 내가 새로 신접 살림을 차리는 것처럼 흥분도 되고 기대됐다. 내 마음은 오직 아이들에게만 가 있었다.

그런데 자식 둘이 빠져나간 집은 썰렁했다. 같이 웃고 뒹굴던 거실엔 이제 나 혼자밖에 없었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바빠진 남편은 매일 늦게 들어왔고, 그래서 종일 나 혼자서 텅 빈 집에 있었다.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신문도 재미가 없었다. 텔레비전 역시 아무 재미가 없었다. 난 갈 바 없는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며칠을 보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위기감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 둘이서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재미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랬다.

"여보, 당신도 재미없지? 나도 재미 하나도 없어. 내가 자식들한테 올인한 엄마도 아니었는데, 아이들이 없으니 아무 재미도 없네. 우리 이래 살면 안 되겠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이래 재미없이 살면 어떡해? 우리 둘이 같이 할 수 있는 걸 만들자. 같이 다니자."

정말 그랬다. 남편과 나는 좋아하는 운동도 달랐고 즐겨하는 취미생활 역시 서로 달랐다. 하지만 찾아 보니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사진 찍기였다.

 그는 말없는 것들의 속삼임에 귀를 기울이고 나는 그런 모습을 담는다.
그는 말없는 것들의 속삼임에 귀를 기울이고 나는 그런 모습을 담는다.이승숙

둘이 같이 할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남편은 작년 가을 어느 날 내게 선언했다.

"나 이대로 살다가는 나를 잃어 버릴 것 같다. 이러다가 감성도 건강도 다 잃겠다. 카메라 한 대 살 거야. 그거로 내 숨 좀 쉬어야겠다."

남편은 교사인데, 평교사가 관리직인 교감, 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몇 년간은 모든 걸 쏟아 부어야 관리직으로 나갈 수 있다. 남편은 그 길로 들어섰고, 그래서 정력을 그 곳에 바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삶을 즐길 여유가 없다. 좋아하던 운동도 잘 할 수 없고 조용히 자기만의 마음밭을 갈던 여유도 부릴 수 없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만의 것들을 다 잃어 버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비상구로 카메라를 선택했다.

 "저요, 저요!" 하면서 서로 발돋움을 하는 이끼들
"저요, 저요!" 하면서 서로 발돋움을 하는 이끼들김진원

나는 남편을 믿는다. 그의 선택과 판단을 믿고 그의 능력 또한 믿는다. 투박해 보이는 그의 가슴 속에는 여리고 섬세한 감성들이 숨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이 속에는 섬세하고 결이 고운 감성이 숨어 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 찍는 걸 그가 좋아한다면 나는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가 실천가라면 나는 몽상가다. 이곳 저곳을 기웃대며 놀러 다녔으면 하는 꿈을 늘 꾸었는데 살림 사는 주부라서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와 함께 하면 겁날 게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둘이 놀러 다니면서 사진 찍고 글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지난 투표일(9일)에 우린 산에 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산을 보고 싶어서 둘이 나선 거였다. 우리 둘은 다 자기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그는 그의 카메라를, 나는 내 카메라를 들고 산에 갔다.

그는 새싹과 꽃들, 그리고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찍었다. 우리는 둘 다 관심분야가 달랐던 거였다. 그가 말없는 것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는다면 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산마늘'의 새싹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천남성'이었어요.
'산마늘'의 새싹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천남성'이었어요.김진원

빈둥지에 부부애를 채우자

그렇게 우리 둘은 '빈둥지증후군'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을 다 떠나보내고 허전해 하고 갈 바 없어하는 빈둥지증후군을 빠져나온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이 옆에 없어도 괜찮다. 그와 내가 함께 하니 오붓하고 좋다. 생각해 보니 그만이 오래도록 그리고 한결 같이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다 내보내고 노인네들처럼 둘만이 살지만 우리 둘은 지금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같이 산 20여 년 보다 더 먼 날들을 걸어갈 우리, 서로 아끼고 서로 위해주며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빈둥지증후군 #부부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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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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