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학교 자율화를 희망한다

30여년 전 여고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교육 방침

등록 2008.04.21 17:35수정 2008.04.21 18:2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인생에서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다. 지울 수만 있다면 '삭제' 클릭으로 간단히 없애버리고 싶은 여고 시절. 원치 않는 학교에 배정 받으면서부터 고통은 시작되었다. 맹목적으로 학교 스케줄 대로 끌려다녔던 때다. 

 

입학하자마자 실시된 야간자율학습, 오직 대학 진학만이 목표인 학교생활. 우리 때는 요즘처럼 집 근처로 다닌 것도 아니었다. 공동학군과 일반학군으로 나뉘어 시내에 있는 공동학군으로 배정 받으면 대체로 먼 거리를 통학해야만 했다. 등하교 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두번 씩이나 갈아타야 하는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헉헉대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 교문에 들어서면 교복은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수업에 들어가면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기진맥진, 빈혈기였는지 노란 헛것이 자주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내 암담하고 우울했던 기억 밖에 없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보살펴줄 이 없는 가정형편이라 아침은 늘 굶은 채로(요즘은 이런 가정이 더욱 많아진 추세다) 먼 등하교길을 돌아 오밤중에 귀가해 자리에 누우면 이렇게 살아서 뭘하나,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꼴인가, 존재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곤 했다. 얼마나 예민한 시절인가.

 

누구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오직 대학 뿐이었을까. 오로지 진학만을 위한 공부, 공부. 체력장 연습까지 겹쳐하다보니 지칠 대로 지쳐 이대로 잠든 채 깨지 말았으면 싶은 때가 부지기수였다. 꼭 대학을 가야만 하나. 나와서는 뭐할 건데? 

 

지금은 넘치도록 많아진 대학이지만 그때는 그같은 감금생활을 견뎌내고도 진학 못하는 친구가 훨씬 더 많았던 때였다. 강제로 밀어붙여 명문대에 여러 명 보냈으면 뭘하나. 결국 다수의 동기들은 불행한 들러리였을 뿐, 대학 진학도 못한 채 여고 시절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기약없이 흩어졌다. 

 

정말 기이한 것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열반이니 야간 자율학습이니(이건 정말 자율이 아닌 타율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쩜 그리 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당시 우리 학교는 여섯반 중 한 반을 열등반으로 편성해놓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다. 

 

한 반 인원이 65명 내외여도 유난히 튄다거나 수업이 방해될 정도로 산만한 학생도 거의 없었다. 단지 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분리해 놓았다니! 아마 요즘 학생들이라면 거세게 항의했을 것이다. 합창대회에서 등위에 들지 못하면 다른 반들은 서운한 정도의 일시적인 감정으로 지나쳤지만 열반에서는 공부 못해서 차별 받은 거라고 펑펑 울어대는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은 동창회에서도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이다.  

 

변하지 않은 건 또 있다. 그 시절을 거쳐온 우리들이 교육 환경 따라 정보 따라 사방팔방 휘돌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가 되도 되어있을 거라고 확신에 찬 상상을 하게 한, 공부의 달인이랄 수 있는 동기들이 자식 뒷바라지에 올인하는 것을 목격할 때는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을 외국에서 자식 뒷바라지만 하다 최근에 귀국했다는 친구를 보고 누군가 한 마디 던졌다. 넌 교수 정도는 당연히 하고 있을 줄 알았다고. 정작 아까워하는 건 친구들이고 본인은 배시시 웃고 만다. 외국에서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친구들은 잘 풀려나간 경우다. 나 역시 부러울 때가 많다. 적어도 우리나라처럼 대통령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돌변하는 이상한 나라는 아닐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강남 사는 동창생이 많다보니 동창회도 그 부근에서 하는데 무지무지 수다스러워진 나는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얘들아, 난 말이야~ 강남 땅 밟고 오면 신발에 묻은 흙도 털어버리기 아까워서 조심스레 벗는단다. 너희들 덕분이야! 고마워~."

 

오르지 못할 나무에 대한 선망을 감추고 웃음으로 버무려놓는 나의 간교함이여. '그때 너도 있었냐' 싶을 정도로 나는 조용히 묻혀 지냈다. 그 정도로 말없이 뒤처져있던 내가 재미있는(?) 수다쟁이가 되어 친구들을 자주 웃겨놓으니 나의 변화에 놀라는 친구들이 많다. 열악한 환경 탓에 세상의 부조리를 너무 일찍 알아버려 모든 것에 염세적이었고 웃을 일도 없을 뿐더러 누구와도 섞이질 못한 베돌이였기에 그럴만도 하다.   

 

전혀 집안을 돌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내 어머니는 교육열은 대단했지만 출세지향적이지는 않았다. 꼭 대학을 가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의 목적은 사는 동안 답답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이며 공부는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저 하고 싶어야 하는 거라며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다. 그럴 틈도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큰 딸은 고교 시절이 아쉬울 것도 없고 후회되는 것도 전혀 없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편집부 활동하면서 취재한답시고 사람도 많이 만났고 이성 친구도 사귀면서 내가 보기에도 비교적 여유로워 보였다. 수험생 어미로서는 함량 미달인 불량 엄마를 두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고3 담임은 학기 초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고3이 무슨 남자 친구냐며 당장 끊게 하라고. 19살이면 성인 감정인데 어떻게 상황이 바뀌었다고 맺어온 인연을 단번에 끊냐고, 대학 진학에 차질을 빚더라도 현재의 아이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다고 웃으며 대꾸하니 함께 있던 학부모들이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했다. 그 후로도 학부모들은 마주칠 때마다 딸의 근황을 물어보곤 했다.   

 

지금은 작은 딸이 고3생이다. 야간자율학습 빠지고 싶어할 때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오라고 한다. 나와서 실컷 자든지, 친구랑 놀든지 맘대로 하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학교에 묶여있으니 혼자 놀 수도 없고 한바탕 자고 컴퓨터랑 놀고 나면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지 한동안은 잘버틴다. 뭐라고 하고 빠져 나오지? 그러면 능력껏 창의성 발휘해보라고 한다. 안 되면 엄마 팔아! 그러기도 한다. 가끔 거짓말을 해서라도 일탈해야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중언부언 늘어놓지만,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학생 편에 선 학교 자율화를 고려해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목표도 다르고 공부 방법도 각각인 학생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잡아두는 것은 정말이지 비효율적이다. 정상 수업 외에 남아서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남아서 하고 도서관에서 하고 싶은 학생은 그렇게 하고 본인의 진로에 도움이 될 만한 곳을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학생은 그리로 가야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율하에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 작은 딸은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더니 시간을 내기 어렵자, 새벽반을 얼마 전까지 다녔다. 개근해서 원비도 10% 할인 받았다고 좋아했을 정도로 잠의 유혹을 물리치며 열심히 다녔던 것이다. 목표한 대학 진학에 보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것 뿐이다. 

 

백년 계획은커녕, 대통령 임기만큼의 졸속 계획으로 일관된 교육정책으로 아이들의 내면은 더 황폐해질 것이다. 무조건 학교에서 잡아둔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학교 자율화라는 명분 속에 얼마나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무한 경쟁 체제로 학교장들은 명문학교를 만들기 위해 선생들을 다그칠 테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원으로 학교로 잠 잘 시간 먹을 시간조차 빼앗긴 채 마구잡이로 끌려다닐 것이다. 정작 본인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로.

 

학교와 학부모는 진정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들과의 협의도 없이 담당자들끼리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졸속 정책 앞에 더는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심사숙고할 일이다. 교육정책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단번에 바꿀 게 아니라 서서히 단계적으로 시간을 갖고 상호보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머지않아 모두가 환영하는 학교 자율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싶다.

2008.04.21 17:35ⓒ 2008 OhmyNews
#학교자율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4. 4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5. 5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