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 같은 '전국민' 건강보험은 꿈일까

구로 이웃들과 함께했던 8년간의 의원 생활을 정리하며

등록 2008.04.22 14:06수정 2008.04.2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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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의원은 서울 구로구에 있다. 처음 개원할 때만 해도 길 건너 길가에만 번듯한 집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다 쓰러져가는 듯한 집들이 많았다. 일명 '쪽방촌'이라는 것이 10년 전에만 해도 구로에는 많이 남아있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미신도 많이 믿는지, 몇 집 건너마다 높은 장대에 빨간 깃발이 꽂혀 처음 그 지역에 문을 열었을 때에는 저게 뭔가 궁금한 적도 있었다. 알고 보니 점을 치는 집들인데, 흔히 보살집이라고 했다.

 

그런 집들이 3, 4년 전부터는 다 없어지고 아파트와 디지털 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 동네도 번듯한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진료실 안의 분위기는 그다지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단지 가슴에 ID 카드로 된 명찰을 맨 사무원들이 많이 찾아오고, 엄마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외에는 비슷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수급권자' '차상위계층'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 지역은 건강보험의 수급권자들이 많은 곳이다. 수급자, 또는 수급권자는 말 그대로 급여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저소득층을 얘기하며, 정확한 표현으로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건강보험에서의 혜택과 교육 및 생활에 일정 도움을 받는 권리가 주어진다. 영세민, 저소득층, 생활보호대상자란 말이 차별성을 지녔다고 해서 '수급권자'라고 바꿔 부르면서 권리를 뜻하는 '권'자를 더 집어넣은 것이다. 워낙 말이 어려워서 진료를 하면서도 이 말뜻을 이해하는 데 1년도 넘게 걸렸다.

 

거기에다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용어가 또 있었다. 차상위계층이다. '차상위계층(次上位階層)'이란 용어 정의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나와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아닌 자로서 소득 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이면서 부양의무자의 부양능력 없음이 인정되고, 희귀난치성 질환 또는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명칭이다. 말 그대로 최하위(밑바닥)에서 두 번째[次] 위인[上位] 계층(階層)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최하위계층)의 바로 위의 저소득층을 이르는 용어이다. 이들에게는 전액 본인부담 면제는 아니지만 일부 면제를 하고, 교육이나 생활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 말 또한 어려워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용어이다.

 

국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혜택을 준다는 의미에서 용어가 어떻든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 예산을 줄이려는 의도로 이들에 대한 지원마저도 줄이려고 하였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러한 퇴보한 정책을 더 강화할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 지원으로 이들을 보살핀다는 것은 '실용'이나 '경쟁'이란 이미지에 안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이다.

 

국가예산 조금 줄이려다 오히려 사람만 잡게 된 건강지원책

 

지난해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의 의지로 밀어붙인 '1종 수급권자의 본인부담금 납부, 선택병의원제, 파스 비급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급여제도 개악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 최하층 사람들의 건강권을 지켜주기는커녕 의료 이용을 오히려 막아버리게 되었다. 처음에 나도 이 분들이 너무 병원을 자주 다닌다는 느낌도 있었고, 파스가 그다지 효과가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 정책을 심정적으로는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한 달 정도의 진료 차트를 훑어보았다.

 

특별히 이 분들이 파스를 더 많이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병원을 더 많이 이용한 것도 없었다. 그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처럼 극히 일부 수급권자들이 일부러든, 어쩔 수 없었든 병원을 과도하게 이용한 경향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경험은 동료 의사들과 얘기해 봐도 비슷했다.

 

기관지 천식, 협심증, 고혈압, 무릎관절염 등 10여 개의 병명을 달고 있는 우리 병원 뒷집 할머니는 얼마 전 일정액수로 정해져 있는 병원 진료비를 다 썼다고 고열에 기침이 심하면서도 병원에 안 오다가 큰일을 치를 뻔하기도 했다. 어르신들은 감염이 되면 금세 폐렴과 패혈증 등 무서운 합병증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돈 몇 푼 아끼려는 정부의 몰상식한 정책이 빚은 현상이다.

 

입원했다가 다시 우리 병원을 찾은 할머니는 혈압강하제와 이러저러한 약들을 처방받고 나가면서 자꾸 뒤돌아보았다.

 

"차라리 내 돈 내고 병원 다니는 게 마음 편하겠어. 몇 천 원 통장에 넣어주고 그것만으로 병원 다니라니 무서워."

"할머니, 전번처럼 하지 마시고 아프면 빨리 병원 오세요."

"알았어. 그런데 통장에 얼마나 남았을라나…?"

 

혼잣말을 되뇌면서 진료실 문을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평등한 진료 가능한 전국민건강보험 만들었으면

 

수급권자, 차상위계층… 굳이 이런 어려운 말까지 만들어가면서 생색낼 필요가 뭐 있겠나 싶다. 이 용어에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아이들은 창피해서 무료 급식도 안 먹는다고 한다. 그런 표현으로 국민들을 소득별로 나누지 말고 그냥 전국민건강보험 틀에 모두 넣고서 진료를 받게 하면 되지 않을까? 보장성도 충분히 높여주고, 본인부담도 최대한 줄여주면서 말이다.

 

국가 지출이 늘어난다고? 물론 재정지출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보험재정을 생각하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 수준으로는 지금의 두 배 정도까지 보험 재정을 높여야 하고, 누수되는 재정은 국민건강을 높이는 지속적인 방안 - 즉, 예방과 보건관리를 통해 질병을 막고, 진료 낭비를 막는 의료 시스템 - 을 만들어나가면 얼마든지 전국민에게 평등한 진료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구로는 아직도 가난한 동네이다. 거리는 번듯하게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결식아동이 많고, 혼자 지내는 어르신들이 많다. 진료 차트에 '의료 수급자'라는 표시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교역 수준 10위의 나라, 국민소득 2만불의 나라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정말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이들을 감싸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어미가 돈 없다고 자식을 병원 못 가게 하고, 아파도 참으라고 다그치겠는가? 품을 팔아서라도 아픈 자식을 낫게 애쓰는 것이 부모이고 나라의 도리이다.

 

가난하지만 정들었던 구로를 떠나며

 

이제 나 개인 사정으로 8년 동안 진료를 했던 구로 지역을 떠나게 됐다. 미안해서 떠난다는 말을 아직도 못 하고 있는데 그 동안 능력 없는 나를 믿고 찾아와준 동네분들에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맞벌이 하느라고 아이가 아프면 진료 끝날 때쯤 허겁지겁 아이를 들쳐업고 병원 문을 들어서던 승희 엄마, 동네 전셋값이 올라서 변두리로 이사간 후에도 계속 여기를 찾아오는 지훈이네 가족, 매번 올 때마다 숨을 헐떡이며 내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병원 뒷집 할머니….

 

바보 같은 정부에서 무서운 정부로 바뀐 이 시점에 더 힘들어질 이들을 뒤로 하고 나 혼자 구로를 떠나려니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어디 가서든 내가 할 일은 누구도 절망하지 않으며 믿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위안하며 한분 한분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웹사이트 이스트플랫폼(www.epl.or.kr)에도 실렸습니다. 글을 쓴 고병수 기자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이사이자, 현직 의사입니다.

2008.04.22 14:0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웹사이트 이스트플랫폼(www.epl.or.kr)에도 실렸습니다. 글을 쓴 고병수 기자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이사이자, 현직 의사입니다.
#건강보험 #수급권자 #차상위계층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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