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500페소! 과연 범인은?

[자전거 세계일주 72] 멕시코 아캄바로(Acambaro)

등록 2008.04.29 13:46수정 2008.04.2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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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 자주 애용하는 멕시코 최고의 숙박시설이다. ⓒ 문종성

▲ 소방서 자주 애용하는 멕시코 최고의 숙박시설이다. ⓒ 문종성

그러니까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멕시코시티를 향해 가는 중 아캄바로(Acambaro)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날 아침에 세라야(Celaya)에서 고기 듬뿍 담긴 토르따스(Tortas)를 7페소라는 아주 싼 가격에 맛있게 먹고 중간에 작은 마을에서는 귤 1kg을 단돈 2페소(우리 돈 180원)에 구입해 간식으로 먹으면서 오후에 기분 좋게 아캄바로라는 곳에 도착했었다.

 

인정이 많은 작은 도시였던 까닭에 소방서에서 하룻밤을 묵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멕시코의 소방서라면 어느 곳이든 도미토리 시설이 그럴듯하게 갖춰졌기 때문에 하룻밤 보내는 데는 참으로 용이하다. 나는 그간 이곳을 적절히 활용한 까닭에 초저경비로 여행을 해올 수가 있었다. 작은 규모의 소방서에서는 대원 한 명과 루시(Lucy)라는 사무실 여직원이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밀고 들어서자 대원이 "아미고!"를 외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숙소와 샤워실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잠시 후 앳되 보이는 한 사내가 소방서를 방문했다. 루시의 베스트프렌드라는 카를로스(Carlos)였는데 그는 시내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루시와 나, 카를로스가 모두 같은 나이인데다가 영어가 가능한 까닭에 대화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어 언어의 장벽을 넘은 우린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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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따스(Tortas) 패스트푸드 체인점 햄버거보다 훨씬 싸고 맛있었던 토르따스. ⓒ 문종성

▲ 토르따스(Tortas) 패스트푸드 체인점 햄버거보다 훨씬 싸고 맛있었던 토르따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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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러운 오렌지 침만 꼴깍. ⓒ 문종성

▲ 탐스러운 오렌지 침만 꼴깍. ⓒ 문종성

"종성, 시장하지 않아? 내가 오늘 저녁 쏠게." 루시의 제안에 "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하며 구겨 신던 신발을 급하게 고쳐 신었다. 소방서 직원 숙소에다 간단히 짐을 풀고는 가볍게 저녁이나 하러 갈 생각에 트레이닝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짐은 노트북만 빼놓고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상태였다. 밖에 나와서는 소깔로에 위치한 야외 레스토랑에서 익숙한 맛의 고르디따스(Gorditas)도 먹고 타코에 칠레소스를 더한 엔칠라다스(Enchiladas)도 먹고 거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오랜만에 동년배끼리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식사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은근슬쩍 모드가 둘의 데이트, 내가 찍사(사진 찍어 주는 사람의 속된 말)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래서 둘이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정색하며 아니란다.

 

"카를로스, 진짜 루시가 너의 걸프렌드 아니야?"

"아니라니깐! 얜 단지 나의 베스트 프렌드일 뿐이야!"

 

하지만 둘이 다정히 걷고 이야기하며 사진 찍히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둘의 나이 어느 덧 스물 여덟.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로선 나름대로 옆에서 엮어주려고 노력 참 많이 했다. 더군다나 이대로 우정으로 끝내기엔 둘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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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 하이킹 어디를 가더라도 도로에서 히치 하이킹 하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 문종성

▲ 히치 하이킹 어디를 가더라도 도로에서 히치 하이킹 하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 문종성

 

어떻게든 그저 둘을 짝지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게 그 때는 온전한 나의 사명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잠시 산책하다 성당에 들어가서였다. 사진을 찍을 테니, 둘이 함께 앉아 다정스런 모습 연출하면서 기도하라고 은근슬쩍 권유했다. 그리고는 대뜸 둘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주님, 카를로스와 루시가 서로 좋아하게 해 주세요."

 

짐짓 기도하니 둘 다 폭소를 터뜨린다. 마침 성당 내부에 있는 성 안토니오 상 앞에서 여자가 기도하면 남자친구나 남편을 얻는다고 하니 다시 한 번 장난기가 발동해 루시에게 카를로스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루시, 여기 와서 기도해. 카를로스가 네 남자친구가 될 수 있게."

그렇게 장난치며 그날 루시·카를로스와 함께 시내를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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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루시와 카를로스 서로에게는 단지 베스트 프렌드. ⓒ 문종성

▲ 다정한 루시와 카를로스 서로에게는 단지 베스트 프렌드. ⓒ 문종성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카를로스·루시와 함께 기분 좋게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보니 패니어(자전거용 짐가방)가 이상한 거였다. 원래 나올 때 가방을 엎어두고 나왔는데 다시 뒤집혀 정방향으로 놓여있었다.

 

'혹시'하는 마음에 가방 속의 지갑을 보니 아니나다를까 500페소짜리 두 장 중에 한 장이 없어진 듯했다. 하지만 함부로 의심할 수 없었다. 평소에 워낙 돈관리를 하지 않기에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다른 곳에다가도 찔러 두었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500페소짜리 거금을 구태여 지갑에서 꺼낼 이유도, 지금까지 꺼내야만 했던 상황도 발생한 적이 없었다. 과달라하라에서 두 장을 챙겨 왔었는데 한 장이 소리소문 없이 일장춘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더더욱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결정적으로 다른 한 패니어의 지퍼가 닫혀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들과 나가기 전 노트북을 빼고 지퍼를 닫지 않았었다! 평소 습관도 그런 걸 귀찮아하는 까닭에, 노트북을 다 쓴 다음 노트북을 넣을 때 가방 지퍼를 닫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되자 의심은 어느덧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혼자 남은 소방대원에게서 처음 만났을 때의 살가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내 시선을 자꾸 비켜갔다.

 

"이상해 가방이!"

 

카를로스와 루시에게 정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소방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연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난 심정적으로 혼자 남아 있었던 대원을 범인으로 찍고 있었다.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친구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자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소방관의 기막힌 답변.

 

"내 생각엔…."

과연 어떤 꿍꿍이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까? 그의 입술과 표정을 주목했다.

"내 생각엔 말야. 귀신 짓인 거 같아."

 

모두가 뚱했다. "뭐라구?" 카를로스가 다시 묻자 대원은 난들 모르겠는데 아마 귀신 짓이 아니겠냐며 딴청을 부렸다. 그리고는 절대로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땅바닥에만 고정시키거나 엄한 데를 둘러보는 것이다. 진실이라면 내 눈을 보고 사근사근 조목조목 답해야 될 일이다. 그러자 난데없이 카를로스가 내게 물었다.

 

"귀신, 믿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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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차를 타는 아이 루시와 카를로스와 시내 돌아다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찰칵! ⓒ 문종성

▲ 장난감 차를 타는 아이 루시와 카를로스와 시내 돌아다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찰칵! ⓒ 문종성

난 그만 어이가 없어서 표정을 찡그렸다.

 

"조심해, 여기 사람들 함부로 믿으면 안 되거든."

 

사무실에서 일하는 루시가 영어로 조근조근 상황을 말해줬다. 소방관은 그 이후한 번도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얘기는 물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500페소면 정말 큰 돈이다. 이 지역에선 귤 1kg이 단돈 2페소다. 타코는 3~5페소 정도다. 거기에 치킨이 한 마리에 50페소이며 숙박비도 100페소 안팎이다. 그런데 먹는 거 외엔 숙박비라곤 전혀 지불해 본 적 없는 내가 그 큰 돈을 함부로 굴렸을 리가 없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평소에 관리를 하지 않은 내 죄가 컸다. 어쨌거나 원인을 제공한 내 잘못이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귀신짓이라고 둘러대는 그의 눈에 상당한 불신감을 느꼈다. 다른 이유도 많을 텐데 하필 귀신타령이라니. 미리 준비한 그럴 듯한 변명 따윈 없었는지.

 

찝찝한 기분 털어낼 수 없을 때 마침 다른 소방대원이 야간 근무조로 출근했다. 그는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더니 반가웠는지 대뜸 먹을 걸 사준다고 했다. 전권이 손님인 나에게 주어졌고 내가 피자를 먹고 싶다고 하니 덜컥 하와이안 콤보 라지피자를 주문한다.

 

정신이 없는 통에 그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앞으론 철저히 지갑관리 해야겠다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칠 마음으로 내 실책을 나무랐다. 그리고 사람을 너무 믿어서도 안 될 것 같다. 벌써 멕시코에서만 몇 번째 작은 소란인지. 마음이 심란하니 피곤이 몰려오며 미열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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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레그린나시온(Peregrinacion) 교회까지 행렬하는 모습. ⓒ 문종성

▲ 뻬레그린나시온(Peregrinacion) 교회까지 행렬하는 모습.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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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종료 프란시스코가 사 준 피자로 아쉬움을 달래는 밤. 심증으론 확실히 범인인 소방대원은 조용히 퇴근했다. ⓒ 문종성

▲ 상황 종료 프란시스코가 사 준 피자로 아쉬움을 달래는 밤. 심증으론 확실히 범인인 소방대원은 조용히 퇴근했다. ⓒ 문종성

얼마 후 피자가 배달되고 피자를 사 준 프란시스코가 루시에게 내 얘기를 전해 듣고는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런데도 참는 걸 보니 당신 성인이군요."

 

참는다기 보다 해결방도가 없는 것일 뿐. 입에 들어가는 피자 위에 오늘의 찝찝함까지 말아 넣어 잘근잘근 씹어 우적우적 오므린 다음 강한 위산으로 삭혀버렸다. 그래도 망각 때문에 즐거운 인생. 날마다 주어진, '하루'라는 새로운 도화지 위에 새롭게 그려나갈 그림들이 있어 단 하루가지고 삶을 평가하기란 어리석은 법. 내일은 또 내일의 새로운 태양이 뜨리라 생각하니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왔다. 이런저런 얘기로 밤이 깊어가고 이젠 슬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그런데 이 양반,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웃고 떠드는 사이 혼자 근무서다 아무도 몰래, 도둑걸음으로, 인사도 없이 조용히 퇴근해 버렸다. 이것 참 '나 도둑이요'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내 심증이 맞다면 나의 500페소가 오늘밤 그의 아이들에게 풍성한 피자가 되어 돌아가기를. 대신 나는 오늘 밤 500페소짜리 럭셔리한 소방서에서 잠을 잔다. 이렇게 해야 여행이 즐거워지는 것이니까.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2008.04.29 13:4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세계일주 #문종성 #멕시코 #자전거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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