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무덤으로 통한다

기마켜니의 세상보듬기

등록 2008.04.25 08:49수정 2008.04.25 11:3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어릴 때만 해도 산에 오르면 어느 산이든 오롯한 길이 나 있었다. 어디든 그 길을 따라 가고 올 수 있었다. 올라간 길로 다시 오든, 다른 길로 내려오든, 오솔길만 따라 가면 되었다. 산등성이든 산골짜기든. 그러나 요샌 아니다.


a

각시붓꽃 각시붓꽃이 수줍게 오솔길 옆으로 빠꼼 고개를 내민다. ⓒ 김학현


봄 햇살을 방 안에서 흘려보내는 것은 햇살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슬금슬금 신앙심이 발동하는 오후 시간에 내 엉덩이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눈 박고 있던 <내 영혼이 따듯했던 날들>을 책상 위에 뒤집어엎어 놓은 채.

뒷산으로 물 한 병 허리에 차고 들어선다. 시작하는 길은 창대하다. 경운기도 넉넉히 오를 길이다. 넓은 길을 따라 오르니 잘 다듬질 된 무덤군이 나를 반긴다. 경주 이씨들이 가지런히 이름표를 달고 누워있다. 무덤을 한 바퀴 돌아 갈 만한 길을 찾아 들어섰다. 산등성이로 낙엽에 묻힌 길들이 어렴풋하게 누웠다.

a

제비꽃 길숲에서 제비꽃도 반갑다고 인사한다. ⓒ 김학현


잘 잡았다 싶던 길은 어느새 잡목과 가시덩굴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청가시덩굴이 길을 막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가시나무가 길을 막는다. 고목이 쓰러진 채 길을 턱 막고 누웠다 싶으면 다시 무릎까지 덮는 낙엽들이 길을 막는다.

거미줄을 나무막대기로 휘저어 끊으며 길 없는 길을 만들며 걷는다. 하늘소 한 마리가 죽은 나뭇가지에 붙어있다. 살며시 잡으려고 다가가니 몸을 던져 낙엽 속으로 숨는다. 한 자도 넘는 낙엽을 아무리 휘저어 찾아도 감감 무소식이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만다.

a

양지꽃 양지꽃은 무덤 위 둔덕으로 한 아름이다. ⓒ 김학현


길처럼 생겼으면 들어선다. 길처럼 생기지 않은 곳은 길을 만들며 간다. 가시덩굴이 막으면 막대기를 주워 후려쳐 길을 낸다. 죽은 나뭇가지들이 내 가는 길을 막으면 등산화로 밟고 뛰어넘는다. 고목이 쓰러져 있으면 고목을 길 삼아 타고 간다. 나의 뒷동산 등산은 대개 이렇다.


그러다 보면 길이 나겠지, 하는 맘이다. 길이 안 나면 계속 길을 만들며 가지, 하는 맘이다. 세상에 어느 길이 처음부터 길이었던가. 가는 사람이 있으니 길이 된 것이지. 그래서 나는 개척교회보다 더 쉬운 길 내기 등산을 한다. 한 시간을 그렇게 길을 내며 걸어도 도무지 내려오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

a

꿀풀꽃 무덤 분봉 위로는 꿀풀이 진한 향기를 뽐낸다. ⓒ 김학현


이 등성이를 타고 가 보면 저 아래쪽으로 희미하게 들판이 보인다. 다시 저 등성이 쪽으로 타고 가보면 공장 굴뚝이 보인다. 내가 사는 집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골 저 등성이를 헤매다 안 진리 하나, 모든 길은 무덤으로 통한다는 것.


무덤으로 가면 길은 기가 막히게 나타난다. 무덤과 무덤 사이에 길이 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인도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만은 아닌 모양이다. 역시 죽고자 해야 산다는 성경의 진리는 이런 데도 어울리는 모양이다.

난 이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다. 무덤을 찾는다. 무덤을 찾으면 그 무덤은 날더러 이쪽이 내가 갈 길이라고 가르쳐 준다. 무덤에게 길을 묻다 내가 그 무덤에 들어가는 날 삶이란 걸 이 세상에 놓고 가겠지. 무덤이 되어 다른 산 자들을 인도할 것이려니. 죽음보다 더 분명한 길은 없다.
#길 #인생 #무덤 #꽃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2. 2 [단독] 순방 성과라는 우즈벡 고속철, 이미 8개월 전 구매 결정
  3. 3 돈 때문에 대치동 학원 강사 된 그녀, 뜻밖의 선택
  4. 4 세계 정상 모인 평화회의, 그 시각 윤 대통령은 귀국길
  5. 5 김용의 5월 3일 '구글동선'..."확인되면 검찰에게 치명적, 1심 깨질 수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