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무슨 색깔을 좋아할까, 하다가...

연지쁜지 육아일기(1) 엄마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큰 딸아이

등록 2008.04.25 20:21수정 2008.04.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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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병이 나서 아이가 사흘을 어린이집에 못 갔다. 그리고 사흘째 나는 몸살이 났다. 온종일 누워있어야 했고, 아이는 계속 티비만 보게 했다. 아직까지 혼자 노는 법을 잘 모르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물감놀이도 내가 옆에 없으니까 두 장만 그리고는 손에 묻는 게 싫다며 끝이다. 아이 낳고 나도 허리가 아파 아이의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늘 걱정되는 바이지만, 엄마가 계속 병약했던 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성격은 많은 손상을 입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불행했던 예술가들 중에서도 그런 인물이 많고.

 

아이는 이제 타인의 마음과 상태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 건지 우울해 하면서도 엄마에게 같이 놀아달라고 많이 보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니 가슴이 짠하고….

 

다음날, 몸이 좀 나은 것 같았지만 역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 누워있었더니 먼저 깨어 마루에서 놀던 아이가 내게로 달려든다.

 

"물 좀 갔다 줄래?"

 

목도 말랐지만 연지 기분도 좋아보이고 심부름이라도 시켜서 엄마와 교류를 하는 게 좋겠다 싶어 물을 부탁했다.

 

한 번도 물을 제 스스로 따라 먹은 적도 없으면서 그래도 대뜸 2리터짜리 물병을 들고 온다. 물은 반 정도 차 있다.

 

"그런데 엄마 컵이 있어야 되겠는데…."

 

심부름 하는 걸 좋아하는 눈치여서 다른 걸 또 요구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보조 의자에 올라가 싱크대 위에서 컵을 하나 가져온다. 설거지를 못해서 깨끗한 컵은 없고 물을 따라 마시지 못할 정도로 더러운 컵이다.

 

"미안한데, 이 컵은 너무 더러워서. 싱크대 안에 있는 새 컵을 좀 갔다 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심부름을 즐기는 아이에게 아픈 엄마로서 그렇게라도 즐길 거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싱크대의 컵 수납장을 왼쪽, 오른쪽, 엄마의 지시로 겨우 찾은 아이가 수납장 문까지 다시 잘 닫고 돌아와 베이지색 커피잔을 내게 내민다.

 

"엄마가 무슨 색깔을 좋아하나? 그래서 살색을 가져왔어."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단지 심부름이 재미있어서 계속 왔다갔다 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라면, 엄마가 아픈 걸 알고 엄마를 위해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엄마가 이 색을 좋아해서 이 컵을 갖다주면 좋아할 것 같았어?"

"응, 그리고 여기 이렇게 꽃도 그려져 있잖아."

 

나는 색깔감각을 키워주려는 목적으로 아이가 이유식부터 먹던 식기를 똑같은 모양으로 된 노랑, 주황, 연두, 파랑 네 가지 색깔 세트를 사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늘 무엇을 마실 때마다 색깔을 지정해서 거기에만 따라달라고 하는 통에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싶고 몹시 짜증날 때도 많았는데….

 

그렇게 자신도 까다로운 만큼 반대로 엄마가 어떤 컵을 좋아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며 타인에게도 섬세하게 마음 써 줄도 알다니….

 

아이를 키우면서 지나치게 예민하고 까다로운게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그러한 성격이 타인에게 까탈스럽게 구는 방향이 아니라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해줄 수 있는 마음으로 성장해 나간다면 그것도 참 좋은 일이겠다 싶었다.

 

그리고 아이의 까다로운 기질에 대해 더이상 불평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타고난 기질을 나에게 맞지 않다고 나무라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꽃피워나가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의무중 하나일 테니까.

 

내 딸이 엄마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컸다는 사실에 대견하면서도 가슴 한 편이 아릿한, 그런 아침이었다.

2008.04.25 20:21 ⓒ 2008 OhmyNews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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