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없는 아줌마 판타지

[리뷰] MBC 드라마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

등록 2008.04.28 11:21수정 2008.04.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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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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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의 '욕망'을 반영하는 장르다. 지루한 역사스페셜보다는 역사적 고증을 조금 왜곡하더라도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이산> 같은 영웅주의 판타지가 더 사랑받고, 현실적인 생활로맨스나 재연드라마보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나 콩쥐팥쥐 이야기를 다룬 가상의 트렌디 드라마가 더 사랑받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나이 서른아홉, 전업 주부로서 살림에만 매달리다가 청춘을 흘려보냈는데, 세월이 흘러 바람난 남편에겐 소박맞고, 토끼 같은 자식들은 주렁주렁 달렸으며, 배운 기술이나 모아놓은 돈도 없는 평범한 아줌마에게 하루아침에 인생역전의 기회가 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로또복권에 당첨되거나 길거리에서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속삭인다. 그것도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백마탄 왕자님이 알아서 찾아와서 '권세와 명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안기며 구원의 메시아로 찾아올 것이라고 달콤한 유혹을 보여준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은 판타지의 달콤함에 그 거짓말을 알고서도 속아준다.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아줌마 신데렐라'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줬다. 톱스타가 된 어린 시절 첫사랑은 오직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애까지 딸린 가난한 이혼녀와 재혼하여 웨딩마치를 올린다. 실제상황이었다면 삼류 여성지나 스포츠신문의 가십난에나 떠오를만한 스캔들을 드라마는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로 그려낸다.

 

아줌마 신데렐라를 다룬 드라마들

 

아줌마 신데렐라를 다룬 이야기는 예전에도 있었다. <아줌마>의 원미경, <두번째 프로포즈>의 오연수, <있을때 잘해>의 하희라, <불량주부>의 신애라 등은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부분 전업주부로서 하루하루 청춘을 소일하다가 남편의 배신이나 실직 등으로 벼랑 끝에 몰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자 젊은 연하남에게 사랑받는 '여자'로서 부활한다.

 

이것은 10대나 20대가 주축이 된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설정에 그저 주인공의 연령층만 높인 것뿐이다. 아줌마 신데렐라 스토리의 한계는 언뜻 보면 중년 여성의 '자아발견 혹은 각성'에서 출발하는 듯하지만, 본질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남자로 인해 부활하는' 이야기다.

 

도입부에 주인공 여성을 버림으로써 사건의 발단을 제공하는 것도 남자고, 그녀에게 구세주로 나타나 새로운 인생역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남자다. 경제적인 자립이 뒷받침되어 있지않은 여성에게 선택의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짧은 시간에 신데렐라로 부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미 모든 조건이 구비된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는 길뿐이다.

 

이것은 나이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선 '순수한 사랑'의 구현 따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진한 인식이다. 아줌마 신데렐라와 그를 만족시킬 백마 탄 왕자님의 자격조건은 꽤 엄격하다. 외모지상주의에 물질만능주의는 젊은이들 뺨친다.

 

하긴 히로인이 뚱뚱하고 못생긴 진짜 아줌마여서는 곤란하니까. 백마 탄 왕자님들의 콩깍지를 정당화하고, 히로인의 여성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오연수나 하희라, 최진실처럼 억척스러운 척 우기지만 모두가 '미중년'이라고 인정하는  주인공들이 제격이다. 아줌마가 아무리 별볼일없고 초라한 보통 주부라고 할지라도, 상대 파트너는 반드시 대기업 '실장님'이거나 연예계 톱스타쯤 되는 사회적 지위에, 외모는 오지호나 정준호쯤 되어야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다.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에는 아줌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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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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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에는 아예 아줌마가 없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한 장르 특성상 드라마 속에서 현실 속 아줌마의 질펀한 고뇌나 리얼리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극중 홍선희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주변의 환경에 휘둘리다가 결국 송재빈의 사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줌마 혹은 주부로서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이나 여성으로서의 자아발견 같은 요소들은, 극 중에서 간간이 희화화된 모습으로만 드러날 뿐, 그녀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 주도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홍선희는 오히려 최진실이 젊은 날 주연했던 10대 취향의 트렌디 드라마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수동적인 신데렐라형 캐릭터다. "여자는 40이어도 50이어도 여자라서 예쁜데 여자들은 그걸 모른다"는 정준호의 독백은 남자들의 보편적인 심리라기보다는, 여자들이 세월이 흘러서도 남자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에 가깝다.

 

이런 것을 보면 드라마는 대중에게 현실 그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얼마나 거짓말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여 위안을 주는데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그 판타지에 알고서도 속아주거나, 욕하면서도 정작 빠져들게 되는 것. <온 에어>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어쩔 수 없는 흥행 드라마의 공식이다.

2008.04.28 11:21ⓒ 2008 OhmyNews
#드라마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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