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책시렁고개를 세우고 올려다보아도 잘 안 보이는 높은 책시렁. 여기에 달린 시계.
최종규
그런데, 요즘 작가라고 하는 분들은 왜 꼭 'tip' 같은 말을 쓸까요. 무슨 생각으로 '팁'이라는 말을 쓸까요. 이렇게 알파벳으로 적는 글 몇 줄, 낱말 몇 가지는 얼마나 자기 책을 돋보이게 해 줄까요. 하긴, 책이름부터 "고냥씨한테"가 아니라 "to Cats"이니까.
만화책 <윤필-졸부로소이다>(만화저널사,1990)를 집습니다. 졸부. 재벌. 부자. 떵떵거림. 돈. 권력. 여자.
<사진판 수영교실>(지경사,1983)은 헤엄치는 방법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책 어디에도 누가 글을 쓰고 누가 사진을 찍었는가를 밝히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낸 책을 슬쩍 오려붙여서 엮은 책은 아니냐 싶어서 찬찬히 책장을 넘깁니다. 사진 질감이 떨어지는 대목이 보입니다. 헤엄터 둘레로 '일본 서민 집'이 드러난 사진이 한두 장 보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릅니다만, 이맘때(1980년대까지) 한국 출판사들은 일본책 몰래 베껴서 펴내는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을 했던 그 어느 출판사도 자기들 지난날을 들추어내며 뉘우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서 안 들출까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애써 이루어낸 열매를 몰래 훔쳐서 자기 배를 불리는 짓을 한 일은 어찌하나요? 친일부역도 몹쓸 짓이지만, 도둑출판도 몹쓸 짓입니다. 출판평론을 하는 분이나 출판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이런 도둑출판 역사를 낱낱이 밝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운-양치는 성자>(해뜸,1988)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소설로 보여줍니다.
.. "스님은 왜 중이 되셨어유?" 문득 역습하는 삼돌이의 말에 언기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알아도 소용 없지만 좀 얘기해 주세유. 공자왈 맹자왈 해서 출세하면 부귀영화가 산더미처럼 쌓일 텐데, 하필이면 중이 되어 세상을 저버리다니유." "세상을 저버린 게 아니고 잠시 떠난 것이요," "그게 정말이세유? 첨 듣는 말씀인데유, 상투 자르고 흰옷을 벗구 먹울옷을 걸치는 이는 영영 세상을 잊는다는데유." "도를 이루기 위해서 온갖 번뇌를 잊고 오로지 청정여여(淸淨如如)한 자기 성품으로 돌아가는 마당에는 세상도 잊고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야지요. 허나 도업을 이루어 해탈한 뒤에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도탄에 빠져 헤매이는 중생을 건지는 게 수도인의 사명이랍니다." "아, 네에." .. (114∼115쪽)<명승고적 탐승기념>(건흥사진문화사,?)은 '속리산 관광기념 사진'을 묶습니다. 앞에 무지개빛 사진을 여러 장 담는데, 빛분해가 잘못되어 보기 나쁜 한편, 뒤로 이어지는 흑백 사진은 제법 잘 나왔습니다. 60년대에 만든 것이 아니랴 싶고, 머리에 쪽을 지고 우리 옷을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절일을 돕는 뒷모습이 한 장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아주머니와 스님과 어린아이, 이렇게 세 사람 나온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을 터이나, 절집을 찍다가 한쪽 구석에 배경처럼 들어갑니다. 다른 사진보다 이 사진 하나가 마음에 듭니다.
<野村誠一-本田理沙 寫眞集 : 少女がおとな>(ワニブックス,1991)는 일본 여고생 모델을 담은 사진책. 자전거에 앉아서 찍은 사진도 한 장 실립니다.
<로랑 바르브롱,백자원-생활 속에서>(봅데강,1985)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프랑스사람 로랑 바르트롱 님이 프랑스에서 스무 해 가까이 찍었던 사진으로 절반을 삼고, 백자원 님이 제주 목석원 둘레에서 찍은 사진으로 절반을 실어서 묶어낸 사진책입니다. 제주로 신혼나들이를 온 부부를 찍은 사진이 곧잘 보이는데, 젊은 아주머니가 아저씨한테 '빠다코코넛'을 한 입 물어 먹으라고 쥐어 주는 사진이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지금도 신혼 나들이를 오는 부부가 '빠다코코넛' 과자를 사먹을까요. 그나저나, 로랑 바르브롱 님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한다면, 프랑스 사진도 나쁘지 않으나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묶어도 좋았을 텐데. 한국에서 찍은 사진은 따로 묶고, 이 사진책에는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만 모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책끝에 실린 사진쟁이 소개에, 로랑 바르브롱 님이 <꼬레 그라피>를 펴냈고 <태권도>를 펴내려고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