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탑 공원을 지나 이젠 탄금대 쪽으로 걸어갔다. 탄금호를 바라보면서 길을 걷는 것도 괜찮긴 하였지만 하루 종일 걷는 것이다 보니 힘들긴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땅을 밟으면서 문화재를 계속계속 만나보고, 그 자취를 찾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란 생각이 든다. 경주야 하루 종일 걸어도 그 곳의 모든 문화재를 보기 힘들다지만, 설마 충주에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이야.
다음 목적지는 관광지도에도 대충 간단하게 표시된 석탑과 석불이었다. 맨땅에 헤딩인 식으로 무작정 찾아온지라 정확한 위치 등을 몰라서 헤매면서 걸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간다면 된다고 하였듯이 결국 그래도 갈 데는 제대로 가긴 갔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충주 루암리 고분군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과 다른 문화재 등을 볼 시간과 코스 등을 생각해 봤을 때, 루암리 고분군으로 가기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암리 고분군은 사적 463호로 지정된 고분군으로서 신라 후기의 고분군이라고 한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이 충주를 주목하였고, 이곳에 중원경을 설치하였다. 그러면서 이쪽의 귀족들과 호족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고, 그들이 묻힌 곳이 바로 루암리 고분군인 것이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작은 마을이 하나 눈에 띄었다. 창동리라고 하는 이 마을은 그 가운데에 석탑과 불상이 있다. 이 석탑을 중원창동5층석탑이라고 부르며, 불상은 충주 창동리 약사여래입상이라고 부른다. 둘 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서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들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중원창동5층석탑은 전형적인 고려석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석탑의 정형성이라는 꽉 조인 끈에서 풀린, 그러면서도 안정감보다 늘씬하면서도 투박한 서민적인 모습을 한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중기단에 5층의 탑신이, 그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 남은 다수의 탑이 이런 식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다.
지대석 위에 자리 잡은 이중기단은 네모반듯하게 잘 짜여 있다. 하지만 세심한 부분에는 크게 신경을 쓴 것 같지 않아, 마치 두부를 잘라 놓은 것 같다. 공장에서 찍어 내듯이 만든 두부가 아닌, 전통 재래식의 투박한 두부 모습이다.
탑신부는 초층과 그 위의 2층부터 5층의 탑신 몸돌의 차이가 크다. 층급받침, 즉 옥개석 아래에 거꾸로 세운 계단처럼 된 부분 또한 1층과 2층은 4단, 3층과 4층은 3단, 그리고 5층은 2단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탑에는 이끼가 끼어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형적인 서민의 탑 모습이고 그 투박함에 매력이 있다. 신라탑의 정교함과 아름다움과 대비하여 고려의 탑은 이런 투박하면서도 떨어지지 않은 격조가 좋다. 마치 푹 고아낸 설렁탕 같다고나 할까?
본래 중원창동5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12세기의 작품으로 창동리의 인근에 있던 절터에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위치는 1978년 본 위치에서 남쪽으로 한 100m정도 되는 지점에 옮겨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길 가다가 고려시대 기와로 추정되는 기와편들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고려시대의 절이 있었던 것이다.
약합 든 통통부처님, 약 한 첩 주실래요?
중원창동5층석탑의 옆에는 충주 창동리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중원창동5층석탑처럼 이 약사여래입상도 서민의 투박함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확 정감이 가는 부처의 모습이다. 머리는 민머리에 육계를 얹은 모습인데, 길쭉한 귀가 머리와 같이 이어져있다보니 이른바 하이바 같다. 하이바를 쓴 통통한 부처님이 헤벌레하며 웃음을 지으면서 약합을 쥐고 서 있는 모습. 이러한 모습에 정감이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다.
불상은 다른 불상에 비해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불상의 미간에 있는 백호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소라모양의 머리모양인 나발도 표현되지 않게 간단한 민머리, 즉 소발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턱에 있는 3개의 주름인 삼도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옷인 법의는 양 어깨에 옷이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통견(通絹)이라고 부른다. 전체적으로 옷자락과 주름이 굵직굵직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법의 자체가 두꺼운 듯한 느낌을 준다.
사실 이 부처님은 5㎝정도만 양각하였을 뿐인데도 두껍게 느껴지면서도 입체감이 잘 살아난다. 전체적으로 간단한 모양새이지만, 그러한 입체감, 즉 양감이 뚜렷하다보니 부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모양새가 근엄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보니 이웃집의 통통하면서도 인심 좋고 넉살좋은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돌에 새겨진 부처님으로서 굳어 있다는 생각보다는 생동감이 넘친다고나할까?
부처님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어있다. 약합이란 약을 넣어 놓은 작은 그릇으로서 이 약으로서 중생들의 아픔을 치료해준다는 의미를 갖는다. 통통하고 짧은 손가락 때문에 어린애 같아 보이기도 하며 당시 고려 사람들은 이 약사여래불을 보고 아픈 부분을 부처님이 치료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럼 꿈에서 부처님이 슬그머니 내려와 아픈 부분을 따듯하게 감싸주면서 약합의 약을 한 점 먹여주지 않았을까?
이 불상은 근처 폐광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7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며 본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절터가 있기 때문에 그와 연관되었으리라 추정된다고 한다.
마을 신앙으로 살아있는 부처님
이들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바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에겐 신앙의 중심으로서 위치한다는 것이리라. 물론 옮긴지는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를 마을 가운데에 놔둠으로서 마을의 기복을 부처님과 석탑에 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를 증명해주듯이 이들의 뒤에는 작은 연등 하나가 걸려있다. ‘극락왕생’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바람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등이다. 이 연등 뿐 아니라 석등도 몇 개 놔둬서 소박하지만 어느 정도의 꾸밈을 해 놓았다.
종교의 등장은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공포를 막기 위한 인위적인 창조라는 말도 있다. 극락왕생이란 현재의 어려움을 내세에서는 아늑함으로서 죽음 뒤의 두려움을 잊고자 하는 소망이다. 이는 거창할 수도 있지만, 더 나은 세계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서민의 소박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잘 살게 되기를... 그게 현재가 아님 내세에서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서민들의 마음이 있는 한, 이러한 문화재는 앞으로도 계속 보존될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의 기복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그대로 남아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2007년 11월 4일 충주 중원창동5층석탑과 창동리 약사여래입상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2008.05.05 15:57 | ⓒ 2008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통통부처님이 주시는 약 한 첩, 이거 하나면 다 낫겠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