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를 어긴 삶은 쉽게 용서되지 않는다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읽고

등록 2008.05.15 16:04수정 2008.05.1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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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사나이가, 가족의 행복과 불행을 자기 일로 여기는 그런 평범한 부친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곁에 도도하게 흐르는 큰 강과 변화무쌍한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 148쪽

 

정화 [淨化] :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문을 열고 나가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있어 큰 숨으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그곳이, 계절이 옮겨가는 걸 진달래가 피고 복숭아가 익고 밤이 우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그곳이, 나를 정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물결치고, 상처받았던 몸과 마음에 조금씩 야무진 새 살이 돋아나고, 보여주기 위한 내가 아닌 원래 나인 나로 살 수 있는 곳은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풍경을 한꺼풀 벗겨내면 거기엔 땀 흘리는 내 몸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묵묵히 들로 나가, 감자를 심고, 어느 날은 고추를 따고…… 마음이 힘들면 땀을 흘리고 몸을 움직이라고 했던가. 아마도 나는 나도 모르게, 정신노동이 만들어낸 몸속의 독소를 육체노동으로 풀고 싶었나 보다. 나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면 내가 정화될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그러나 이 무슨 근거도 없는, 낭만 속에 허우적거리는 자신감인가. 나는 그 낭만 속에 현실의 말뚝을 박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낭만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것이다. 그건 정화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다시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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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 yes24

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 yes24

가족이 있다. 할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아들 셋과 딸이 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흘렀던 물망천을 옆에 둔 쿠사바 마을에, 오래전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아버지가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직장을 다니며 장남 역할을 묵묵히 하는 첫째가 있다. 그리고 가족의 묵묵함과 작은 희망으로 만들어진 돈으로 대학교를 마친 둘째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글을 쓰겠다고 한다. 물에 대해 쓰겠다고 한다. 4년간 쌓여진 희망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둘째 아들은 결국 가족 곁에 눌러앉는다. 그러나 희망이 완전히 절망으로 바뀌기도 전에 이 아들은 조금 모자라서 순수한 여동생과 성관계를 갖는다. 이 가족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정화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도문이 적혀 있는 오래된 망토를 입고,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한다. 다른 이를 해하지 않도록, 악의 기운이 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그 기도문의 역할이다. 어머니는 불단이 있는 별채에서, 삶을 보려하지 않고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듯 살며 마음을 정화시키려 한다. 장남은 마치 죄의식처럼 자신을 학대해가며 포기해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지켜내려고 애쓰며 정화해간다. 일을 저지른 둘째 아들은 극한으로 몰고 가는 노동으로 자신을 정화해 간다.

 

그러나 이 모두는 가짜이다. 이 가족은 죄에서 도망치기 위해, 단지 자신을 숨겼을 뿐, 그 어디에서도 정화는 되지 않는다. 그건 단지 해결책이 아닌 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걸…….

 

이 책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삶에 아주 엄격한 잣대를 가져다 댔다. 순리를 어긴 삶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 쉽게 정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소설 시작부터 둘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이 가족의 진짜 정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게 어쩌면 자연의 이치인지 모르겠다. 세상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고, 자연의 큰 흐름에  맡겼을 때야만 풀리는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죽자 이 힘들었던 가족에게 진짜 정화가 시작되었고,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딸이, 자연의 순리대로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자 정화가 끝이 났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새 목숨이 세상을 조금 더 깨끗이 만들면서 이 가족은 드디어 제 삶을 갖게 된 것이다.

 

정화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상처를 준만큼 나는 고통 받을 것이고, 그 고통은 자연의 순리대로 따를 때에만 아물 수 있다. 내가 정신적 고통을 피해 가식적인 육체노동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인간 본성을 야금야금 건드리는, 그의 문장이 좋다.  겉핥기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 본성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그의 글이 좋다. 아마 미처 말로 만들어내지 못했던 나의 선함과 악함을  그의 소설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08.05.15 16:04 ⓒ 2008 OhmyNews

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사과나무, 2012


#마루야마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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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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