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 호주 내각, '강부자' 한국 정부

[해외리포트] 부유층 부담 늘리고 서민층 혜택 늘린 호주 예산안

등록 2008.05.21 09:16수정 2008.05.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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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캐빈 러드 총리의 '로빈 후드 예산안'을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캐빈 러드 총리의 '로빈 후드 예산안'을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 <시드니모닝헤럴드>


"부자들한테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의적(義賊) 로빈 후드처럼 국가 예산을 편성한 호주 노동당 정부의 정책이 21세기의 신화가 되고 있다."

2008~2009 회계연도 연방정부 예산안(blue print)에 관한 호주 국영 abc-TV 정치부장 린달 커티스의 논평이다. 출범 6개월째인 '새내기' 정부가 발표한 첫 예산안을 살펴보니 영락없이 로빈 후드 행적을 빼닮았다는 것.

이명박 정부가 법인세를 인하하고 과세 대상을 현행 50%에서 60% 수준으로 늘리는 방향, 즉 부유층과 대기업은 혜택을 받고 저소득층의 부담은 늘어나는 쪽으로 세제 개편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한국 뉴스와 정반대다.

이명박 정부와 캐빈 러드 정부는 비슷한 시기에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각각 지난해 12월과 11월). 그러나 한쪽은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다른 한쪽은 '의적 로빈 후드'에 비견되며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한국 정부와 "경제 성장도 중요하지만, 발전의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호주 정부의 선택에 따른 차이일까?

a  '로빈 후드 예산안'을 보도한 호주 국영 abc-TV 웹사이트.

'로빈 후드 예산안'을 보도한 호주 국영 abc-TV 웹사이트. ⓒ abc-TV


호주 2008~2009 예산안은 서민과 노동계층의 승리

해마다 5월 중순이 되면 호주는 돈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향후 1년 동안 국가 살림을 꾸려갈 연방정부 예산안을 놓고 전 국민이 열띤 논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호주 회계연도는 7월 1일부터 다음해 6월 30일까지다. 물론 논쟁을 이끌어가는 그룹은 정치권과 언론이지만 국민의 반응 또한 아주 진지하고 정밀하다.


"국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느 계층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둘 것인가? 국가 예산을 어느 계층에 더 많이 배정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놓고 각계 각층이 한마디씩 거드는 형국이다. 다시 말해 경제 성장 지상주의를 내건 신자유주의와 노동계층 처우 개선을 우선시하는 정책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흥미로운 건 예산안 발표와 동시에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내친 김에 승패의 결과부터 밝히자면, 2008~2009 회계연도 호주 연방예산안의 승자는 서민과 노동계층이다. 중·저소득층의 세금 부담이 대폭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복지 예산 및 공교육 예산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 해 가계 소득이 15만 호주달러(약 1억2천만 원) 이상인 부유층의 경우, 출산 보너스 등의 각종 복지 혜택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5만7000 호주달러 이상의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면 33%의 높은 세금을 물게 만들었고 국민보험제도 등의 의료예산도 고소득층에 불리하게 편성했다.

a  부유층의 희생을 강제한 캐빈 러드 정부의 2008년 예산안.

부유층의 희생을 강제한 캐빈 러드 정부의 2008년 예산안. ⓒ <데일리텔레그래프>


"저소득층에 희생 요구하는 건 언어도단"

연방정부 예산안은 재무장관 책임 아래 준비돼 국회의사당에서 발표된다. 물론 총리의 정치·경제 철학이 담기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산안에 수반되는 책임은 내각 전체의 공동 책임이다. 그게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내각책임제 정치시스템의 특성 중 하나다.

하여, 예산안이 발표된 후에 총리와 재무장관은 각종 미디어와 인터뷰하는 자리를 통해 정부의 공식 방침을 설명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노동당 정부는 노동계층 가정에 유리한 예산안을 마련했다(We tip the scales in favour of working families)"라고 밝힌 웨인 스완 재무장관의 발언이 올해 예산안의 특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거기에 캐빈 러드 총리가 몇 마디 거들었다.

"국가 예산을 편성하면서 어차피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걸 저소득층에 요구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지난 12년 동안 장기 집권한 보수정당 정부는 부유층과 기업의 편에 기울어서 서민과 노동계층을 외면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노동당 정부는 지금 그걸 수정하는 중이다."

러드 총리는 <채널7>과 한 인터뷰를 통해서, 대학 및 중고등학교 공교육 예산의 대폭 확대와 관련하여 언론이 '교육 혁명(education revolution)'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두고 평소의 지론을 한 번 더 밝혔다.

"호주는 지하자원 붐 덕분에 OECD국가 중에서 지속적인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존 하워드 정부 12년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빈부 격차가 더 심해졌다. 그 해결책은 교육 혁명을 통해 기회 균등을 이루는 길밖에 없다. 강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특성상 빈곤의 대물림을 막을 방법은 공립학교 위주의 공평한 교육뿐이다. 그게 내가 교육 총리를 자임하는 이유다."

a  '로빈 후드 예산'을 보도한 <헤럴드선>.

'로빈 후드 예산'을 보도한 <헤럴드선>. ⓒ <헤럴드선>


야당의 거센 반격... 그러나 대세는 바뀌지 않아

그러나 야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의 브란덴 넬슨 당수는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노동당 예산안에 관한 공식 답변 연설(official Budget reply)을 통해서 올해 예산안을 두고 "세금을 많이 거둬서 방대한 예산을 지출하는 구태의연한 노동당 방식 예산안(This is an old-fashioned high-taxing, high-spending Labor Budget)"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넬슨 당수는 이어서 "겉으로는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방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국가 경제와 서민 경제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노동당 지지 계층만을 위한 정책을 막아내기 위해서 상원 비준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휘발유세 5% 인하를 강력하게 주장한 넬슨 당수는 잠깐 동안 여론의 지지를 얻는 듯했으나 자유-국민 연립당 소속 말콤 턴블 재무담당 대변인의 반대 의견에 부딪치면서 연립당의 내분만 노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넬슨 당수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마시는 혼합주류에 부과된 세금의 대폭 인하를 촉구하여 눈길을 끌었다. 알코팝(alcopop)으로 불리는 혼합주류는 음료에 알코올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어 청소년과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노동당 정부가 청소년의 음주 문화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알코팝에 붙은 세금을 무려 70%나 인상하는 방안을 결정하자 넬슨 당수가 발 빠르게 나서서 청소년과 젊은 여성층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뉴스폴(Newspoll)>이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넬슨 당수가 야심만만하게 노동당 정부 예산안의 허점을 공박한 효과는 거의 없어 보인다. 특히 호주 유일의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보도한 '부유층에 대한 출산 보너스 지급 중지가 강력한 지지를 얻다(Strong support to deny rich the baby bonus)'라는 제목의 기사에 인용된 수치를 보면 이 사안에 대한 찬성률이 70%대에 육박한다.

a  부유층에게 불리한 예산안을 지지하는 여론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부유층에게 불리한 예산안을 지지하는 여론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 <디 오스트레일리안>


예산안 발표를 생중계하는 호주

지난 5월 13일 저녁, 호주 국민의 눈과 귀는 행정수도 캔버라로 쏠렸다. 국가 대항전 럭비 경기가 열리는 것도 아닌데 모든 지상파 TV가 생중계를 할 정도였다. 2008~2009 회계연도 국가 예산안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TV 생중계뿐만이 아니다. 그 다음날 <디 오스트레일리안>은 13쪽의 지면을 할애해서 예산안 특집을 발행했고,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데일리텔레그래프>는 무려 17쪽의 지면을 할애할 정도였다.

기자가 호주에 거주하면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예산안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이다.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예산안 발표 내용에 따라 각 개인과 가정의 유익과 불리가 바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예산안 발표 직후 승자와 패자를 판정하여 보도한다.

특히 국가 예산 수입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개인소득세 세율 조정 결과와 국가 예산 지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복지 예산의 분배 결과는 관심의 초점이다. 최근에는 공교육과 환경 문제도 상당한 관심을 끄는 항목이다.

a  노동자에게 유리한 호주 2008년 예산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노동자에게 유리한 호주 2008년 예산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 <디 오스트레일리안>


"기꺼이 로빈 후드가 되겠다"는 총리와 재무장관

이와 관련해 요즘 호주에서는 '2008~2009 회계연도 예산안의 승자는 중·저소득층과 노동계층이고 패자는 연소득 15만 호주달러 이상의 가정'이라는 식의 기사들이 넘쳐난다.

특히 기사의 들머리에 인용한 abc-TV 보도 말고도 2008~2009 회계연도 예산안을 두고 "로빈 후드 예산"이라고 보도한 기사와 만평들이 많이 눈에 띤다. 로빈 후드가 누구인가? 11세기 무렵 영국 셔우드 숲속에서 도적 무리의 두목으로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처럼 도적이면서도 난세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의적이었다. 탐욕스런 부자, 포악한 관리, 타락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의로운 도적 말이다.

사실 호주에도 네드 켈리라는 전설적인 의적이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 태어난 켈리는 세상과 불화하다가 산적(bush ranger)이 됐다. 그는 부자들과 은행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가 체포되어 1880년에 21살의 젊은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인생은 다 그런 것(Such is life)"이라는 말은 지금도 자주 듣는 전설 같은 어록이 됐다.

어쨌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 국가의 정부가 발표한 나라 살림 1년 계획을 도적 행위로 묘사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TV에 출연한 캐빈 러드 총리와 실질적으로 예산안을 편성한 웨인 스완 재무장관이 반색하면서 "기꺼이 로빈후드가 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a  노동자에게 유리한 호주 2008년 예산안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사진은 웨인 스완 재무장관).

노동자에게 유리한 호주 2008년 예산안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사진은 웨인 스완 재무장관). ⓒ <디 오스트레일리안>


취임 후 지지율 70%대... '로빈 후드' 총리를 밀어주는 호주 시민들

한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신화일까? 어지간한 나라에는 한두 명쯤 의적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신출귀몰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러드 총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뉴스폴>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러드 총리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취임 이후 6개월 내내 70% 이상으로 나온 것이 큰 힘이 될 뿐이다(최근 조사는 5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에 실시됐다).

국가 살림을 단순화하면 세금을 거두는 일(수입)과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일(지출)이다. 러드 총리가 신출귀몰한 능력도 없으면서 현대판 로빈 후드가 될 수 있는 것도 부자들에게 더 걷고 서민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의 세금 제도를 채택하고, 사회복지 등의 분배 정책을 통해서 서민들에게 혜택이 더 돌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야당의 반발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부유층이 전 사회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기류가 거의 감지되지 않고 있다. 캐빈 러드 총리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동의하기 때문일까?

"부유층의 출산 보너스를 폐지시킨 예산안이 논란이 되고 있는 걸 잘 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갈 돈을 생필품과 휘발유 가격 인상 등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의 생계에 보탠다면, 그 돈을 못 받는 부자들도 그리 섭섭하지는 않을 것이다."
#캐빈 러드 #로빈 후드 #강부자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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