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밝힐 수 없는 참 이쁜 제자에게
그래, 너의 배후는 나다
이물범
내가 너를 다시 만난 것은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
청계천 들머리였지
많은 촛불들 사이에서
네가 든 촛불도
하얀 종이컵에 싸여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촛불을 바라보는 너의 눈길도
밝게 빛나며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때가
작년 3월
개학과 함께 너는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내가 1학년 국어를 맡으며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지
피부가 좀 검었든가
언제나 웃음이 묻어 있는 얼굴, 유난히 반짝이는 눈
내 눈길을 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 안는 당당함
이것이 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너도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 힘들어 했지만
내 수업시간은 언제나 진지했고
가끔 사회문제 등에 대해
내가 안타까워하며 열을 내면
너는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더욱 반짝이며
내 얘기 속으로 온몸을 던져
뛰어들곤 했지
너는 가끔 내 책상이 있는 상담실에 들러
지나다 그냥 선생님 보고 싶어 들어왔어요
하며, 선생님 저도 선생님 하시는 일 좀 아는데
얼마나 힘드세요
참 우리 엄마도 선생님 존경한데요
그리고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꾸벅 절하고는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당황하면서도 감격했던지
그 뒤 나는 너희들을 떠나게 되었고
너를 비롯한 몇 명과라도
내 처지와 생각을 솔직히 얘기하고
진지한 대화라도 나누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말없이 학교를 그만두어 버렸으니
너흰들 얼마나 황당하고 안타까웠겠니
그리고 해가 바뀌었으니
너는 이제 고2
빛나는 오월 같은 나이
꽃다운 청춘이 되었구나
그런 너를 청계천 촛불 속에서 다시 만났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짠하고 묘했겠니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겠니
아니,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어요?
넌 어떻게 여길 다 나왔니?
라고 묻는 듯한 나의 표정에
너는 너무도 당당하게 그 웃음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구나
저도 사이트 회원이구요
우리 친구들 많이 가입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토론도 하고 열심히 활동해요
선생님 늘 그러셨쟎아요
옳은 건 옳다 하고 아닌 건 아니다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고
그리고 저희들 더러
진짜 실력 있는 멋진 학생이 되라고
그래서 이렇게 오늘도 나왔어요
좀 있다 보면 우리 친구를 많이 만날 거예요
있잖아요, 그 까불이, 걔도 열심히 나와요
너의 얘기를 들으며
놀라는 표정으로 바뀌는 나를 보며
당연한 일을 왜 그러느냐는 듯이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명박 대통령 우리 국민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요
한반도 대운하도 그렇고 교육정책도 그렇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같은 게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거쟎아요
더군다나 우리가 이렇게 촛불 들고 나오는 걸
누가 시켰다느니 배후가 있다느니 하는 것은
정말 우리 학생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우리 학생들에 대한 모독이에요
아니, 누가 우릴 조종한데요?
대학생 형들 취직 준비하느라 정신 없구요
정치하는 사람들 믿을 사람 하나 없잖아요
아, 참, 민주노동당 강기갑은 빼고요
그런데도 우리 배후에 누가 있다는 둥
마치 우리가 어떤 불순한 세력에 의해 조종 받는 것처럼 보도하는
조선일보 같은 것은 진짜 엉터리예요
그게 무슨 신문이어요 쓰레기지
근데 정말 누가 우릴 잘 지도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앞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래서 우리가 보고 따를 수 있는
그런 불순세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보정치의 올바른 실천을 위해
너희들을 포기하고 사표까지 쓰고 나온 나를
촛불을 든 너는
끊임없이 부끄럽게 하는구나
이럴 때, 끓어오르는 대중의 분노가 사무쳐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도도할 때
신뢰할 만한 정치세력이 있어
그 국민의 요구를 받아 그체적 정책으로 발전시키고
여러 가지 정치행위를 통해
그 요구를 확실히 관철시켜야 함에도
네가 보기에도
그럴 만한 의지나 힘을 가진 세력이 없으니
오죽 답답했으면 너희들마져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겠니
나도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까워
강기갑 의원 발꿈치 따라
청계천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 성찰과 참회의 시간을 가지며
우리 인간의 무지와 오만으로 중병이 든
어머니 땅에 입 맞추고
절절한 민중의 외침 앞에
무릎 꿇고 또 꿇으며
지혜와 용기를 빌고 또 빌었지만
아직도 너의 그
순수를 따라가지 못하여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이렇게 마음만 아프구나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각자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시간은 흘러 밤은 깊어가고
어둠이 진할수록 촛불은 더욱 빛을 발하고
촛불 문화제도 서서히 사위어 가고
그래도 너는 일어날 줄 모르고
광야에서도 따라 부르고 아리랑도 함께 어우러지는구나
잘난 사람 못난 사람도 없는
어른도 아이도 없는
모두가 주최자이고 모두가 발언자인
오로지 정성스럽게 켜든 촛불만이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다라는 징표인
참 민주주의의 꽃밭 촛불 문화제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작은 내들이 강에 다다르듯
긴 집회도 끝나고
또 다시 이런 데서 만나자는 인사가 맞는 건지
넌 이제 걱정 말아라 우리 어른이 책임질게
라고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 틈에 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잘 들어가세요 꾸벅 인사하고는
벌써 물결을 이루어 흐르기 시작하는
촛불의 흐름 속으로 주저 없이 빠져드는구나
그러면서 삽시간에 촛불은 강물이 되어
종로로 세종로로 흐르기 시작한다
멈칫거리며 나도
저만치 가는 네 뒷모습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너의 배후인지 네가 나의 배후인지
아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배후였다
작은 촛불 하나하나는 서로의 앞과 뒤에서
다른 촛불을 지켜주며
서로 힘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에 내가 쓴 시
'나의 배후는 너다'가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배후는 있다
동해 일출과 서해 낙조
떠도는 구름 고운 별 무리
그 뒤에는 언제나 하늘이 있는 것처럼
너의 뒤에도 하늘이 있다
어젯밤 너의 하늘은 온통 비바람이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햇살 곱구나
때로 나는 너의 배후를 의심하고
너의 하늘마저 질투해서
고민하고 몸부림치지만
너의 하늘은 너무나 커서
언제나 꿈적도 않는다
그래서 너는 언제나
고우면서도 빛나면서도
쓸쓸하면서도
폭풍우 몰아치고 캄캄하면서도
넉넉하고 당당하다
나의 배후는
너다
<졸시 '나의 배후는 너다' 전문>
나는 너의 뒤를 따라 걸으며
오랜만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 작은 촛불 하나가
너에게도 조그만 힘이 될 수 있다면
너에게도 조그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너의 촛불이 나에게 그런 것처럼
그래서 우리 서로에게 배후가 되어
함께 타올라
온갖 거짓과 불의를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
너의 배후는 나다
덧붙이는 글 | 이수호 기자는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 준비위원장으로 전교조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2008.05.30 17:21 | ⓒ 2008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