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두 노인, 평화를 위해 테러를 모의하다

[이주의 새책] 히로시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등록 2008.06.01 13:33수정 2008.06.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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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2세의 인권을 위해 불꽃처럼 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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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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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원폭 2세 환우 김형률 평전 | 전진성 지음 | 휴머니스트 | 304쪽 | 1만2000원

 

그는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습관처럼 마지막에 자신의 다짐과 소망을 적어넣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서른다섯으로 끝났다. 32살이 되던 2002년 자신이 '원폭 2세 환우(患友)'라고 '커밍아웃'한 뒤 원폭 2세의 유전 문제를 밝히고 인권을 되찾기 위해 남은 생명을 불꽃처럼 태웠기 때문이다.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현장에서 살아남은 어머니를 둔 그의 이름은 김형률(1970-2005)이었다. 그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이기도 했다.

 

이 책은 '면역글로불린결핍증'란 희귀병으로 키 163cm, 몸무게 37kg에 평생 기침을 쏟아내는 삶을 살며, 불행한 역사의 책임 소재를 자신의 몸을 증거로 밝히고자 했던 한 청년에 관한 평전이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소속으로 '김형률을 생각하는 사람들' 모임을 함께 만들고, 5월 29일 3주기를 맞아 이 평전을 펴낸 전진성 교수(부산교대 사회교육과)는, 원폭 2세의 인권에 몸 바친 그를 또 다른 전태일로 기억했다. 김형률이 태어난 해는 전태일이 자기 몸을 불사른 1970년이었다. 그의 삶은 계속되지 못했지만, 전태일이 그렇듯 그의 뜻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가의 폭력에 맞서 테러를 모의하는 두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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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어람미디어

ⓒ 청어람미디어

책이여, 안녕! | 오에 겐자부로 지음 |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464쪽 | 1만2000원

 

사경을 헤매다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한 노(老) 소설가 고기토의 병실로 고향 친구 시게루가 찾아온다. 그는 천재 건축가로 9․11테러 이후 '국가의 거대폭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테러를 제안한다. 자신은 개인 단위의 폭력장치를 만들고, 고기토는 그 과정을 소설로 쓰라는 것. 두 노인은 마침내 '이상한 2인조'가 되어 도쿄 도심의 빌딩을 폭파하려는 테러 계획을 세우고,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작업을 추진한다.

 

1994년 <만엔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스스로가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와 함께 '마지막 장편 3부작'이라 불렀던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폭력, 혹은 '강권'에 '불화하는 의지'를 '인생의 습관'으로 삼기로 결심한"(옮긴이의 글에서) 노작가의 삶과 생각은 소설 속 '페르소나' 고기토와 계속 포개진다. 고기토의 말을  통해 자신의 문학세계를 반추하는 듯한 곳에서도.

 

"지금까지의 작품이 전부 무의미하다고 여기지는 않아. 하지만 그동안 해온 일의 총량이 자신이고, 지금 만년필을 쥐고 있는 자신은 껍데기뿐이며, 죽지 못해 사는 거라고도 생각 안 하지. 역시 살아 있어서 '또 하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신, 이라는 것이 재미있잖아."(205쪽)

 

서울내기 음악평론가가 고향 서울에 바치는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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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담

ⓒ 예담

광화문 연가 | 이영미 지음 | 예담 | 316쪽 | 1만3000원

 

"서울은 참으로 이상한 고향이다. 서울 이야기를 하자고 들어도, 서울만 이야기해서는 제대로 이야기가 꾸려지지 않는다.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서울의 이야기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이야기이며, 또 시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향처럼 그리워하면서도 욕할 수밖에 없고, '빨리 이놈의 서울을 떠나야지' 하고 진저리치면서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우리나라 전체의 애증이 얽혀 복잡하게 응어리져 있는 곳이 서울인 것이다."('머리말'에서)

 

이 책은 그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내기로 자라난 대중음악평론가가 대중가요 노랫말을 빌려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 바치는 연가(戀歌)이다. 식민지시대 경성부터 세계적인 메트로폴리스로 성장한 현재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빛과 그림자, 또 그 속에서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애환이 저자의 추억과 맛깔스럽게 버무려져 있다. 여름철 동해안 대신 한강에서 물놀이를 했던 사람, 남산을 가족 나들이 필수코스로 여겼던 사람, 남의 집 마당으로 넘어간 공을 찾아 "공 좀 찾아주세요"라며 외쳐본 경험이 있는, '이상한 고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추억의 선물이기도 하다.

 

동화이되 동화가 아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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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레

ⓒ 이레

오스카 와일드 환상동화 | 오스카 와일드 지음 | 이은경 옮김 | 이레 | 280쪽 | 2만원

 

제비를 통해 자신을 장식한 보석 모두를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물한 '행복한 왕자'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제비, 그리고 사랑에 빠진 한 청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름다운 노래로 붉은 장미를 피워낸 '나이팅게일과 장미'의 이야기. 언젠가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동화 나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원작은? 행복한 왕자의 동상은 용광로에 녹여지고 죽은 제비는 쓰레기더미에 버려졌다. 또 나이팅게일이 자신의 피로 피워낸 장미는 도랑에 쳐박힌 채 마차바퀴에 짓밟히고 만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작가의 원작은 그랬다. 당대에 냉소와 독설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작가의 명성답게 이 책에 실린 9편의 '환상동화(fairy tale)'들도 대개 아름답기보다 엽기적이고 변태적이다. 권선징악의 교훈을 찾기도 어렵다. 동화이되 어린이를 위한 책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공들여 4명의 작가(김성실 노준구 박혜정 이애림)에게 성인용으로 주문한 '도전적' 그림들도 여느 전래동화 속의 정겹고 푸근한 삽화와는 많이 다르다.

 

그의 '렌즈'는 '벽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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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나무

ⓒ 생각의 나무

한 미국인이 렌즈로 바라본 20년간의 한국풍경 | 드레이트 해밀튼 글·사진 | 생각의 나무 | 232쪽 | 2만8000원

 

저자는 1968년에 미육군 제2사단 사령부에서 전술지휘소 근무병으로 한국을 처음 찾아 14개월을 보냈고,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그 가운데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의 풍경을 흑백사진집으로 펼쳐냈다. 그런데, 특히하게도 제목과 달리 사진에서는 '이방인'의 시선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게 한국은 더 이상 낯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고향이다.

 

'믿음' '노동' '정치지형도' '사람' 네 항목으로 나눠 작품을 실었는데, 각 장 앞에 적어놓은 그리 길지 않은 소개글들은 이 벽안의 사진작가가 그저 렌즈만으로 한국을 만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정치지형도' 장에서 광주 망월동 묘역 사진들과 함께 풀어보이는 '반미감정'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대개의 사진집이 그렇듯 책값은 살짝 부담스럽다. 거기다 비닐 포장까지 돼 있어 구매에는 작은 결단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추천사가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까.

 

"아 단정하고 정확한 사진들 속에 보이는 작업은 손색없는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마치 부산의 수산물시장과 대구, 인천, 서울의 뒷골목에 위치한 홍등가 가운데 위치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에 잭 케루악의 비트적 지복(至福) 추구와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혼합돼 있는 듯하다."

 

색깔을 잃어버린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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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득키득

ⓒ 키득키득
꽃 할아버지의 선물 | 마크 루리 글·그림 | 키득키득 | 32쪽 | 9500원

 

책장을 넘기며 언젠가 보았던 영화 <플레전트빌(Pleasantville)>이 떠올랐다. 한 오누이가 우연히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이뤄진 '플레전트빌'란 마을에 빨려들고, 그들이 퍼뜨리는 사랑과 욕망의 감정에 따라 마을의 사람과 사물들이 하나하나 천연의 색깔을 찾아간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이 그림책도 그렇다. 누더기 가방과 우산을 든 한 할아버지가 한 도시를 찾아든다. 그 도시는 색깔을 잃었다. 사람도 건물도 모두 잿빛이다. 할아버지는 낡은 집 한 채를 세내어 작은 공원을 가꾸고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할아버지의 꽃들이 건네지며 잿빛 도시는 잃었던 색깔을 되찾는다.

 

이 책에는 글이 없다. 프롤로그처럼 씌어진 "할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죠.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단다. 너도 언젠가는 너만의 이야기를 갖게 될 거야.'", 라는 글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림 속 거리와 창문 안의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감을 잃은 화가, 거리의 불량소년, 책더미에 파묻힌 노학자, 무료한 미용사 등등. 처음엔 무심하기만 한 그들의 표정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떻게 바뀌는지 놓치지 말 것! 5세 어린이가 갖고 놀아도 탈이 없도록 책 표지는 푹신하고, 모서리도 둥글게 처리했다.

2008.06.01 13:33 ⓒ 2008 OhmyNews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원폭 2세 환우 김형률 평전

전진성 지음,
휴머니스트, 2008


#이주의 새책 #오에 겐자부로 #김형률 #광화문 연가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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