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을 용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건 변명이 안돼

등록 2008.06.08 07:35수정 2008.06.0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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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여성 시위 참가자를 군홧발로 짓밟은 사건과 관련하여 필자는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사자는 군홧발로 짓밟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지만 관련 동영상과 피해자의 진술을 보면, 아무런 물리력을 갖고 있지 않은 여학생에게 야만적 폭력을 행사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어떤 이유로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명백한 '국가 폭력'이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부정이며, 이를 용인했을 때 국가의 존립 근거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때문이다. 국가 폭력은 일반적으로 제도화된 국가기구에 의한 폭력의 행사를 의미한다.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의한 양민의 학살은 당시 군부 정권의 명백한 정치 폭력이자 국가의 보호대상인 시민을 향한 공권력의 국가 폭력이었다. 이번의 사건도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모든 권력 행사는 시민의 동의를 얻은 것이어야 하고, 동의 없이 이루어진 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는 로크의 '시민 저항권' 개념은 문명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이다. 그는 잘못된 정부에 시민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혁명은 사소한 잘못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민 저항권은 시민 대부분의 동의가 있는 아주 드문 경우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이 사회 유지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촛불집회를 불법으로 혹은 불순한 의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크는 계속하여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반란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촛불집회의 정당성은 그 근거를 갖게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를 폭력으로 진압할 때 이런 형태의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가·시민을 위한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가 중인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특수임무종사자들도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도 오히려 떳떳해 할까?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스킬러'처럼, 지배 권력이 제공하는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신봉하여 그대로 따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노예적 삶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이성적 힘이 결여되어 있을 때 인간은 권력과 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될 뿐이다.

 

여성 시위 참가자를 군홧발로 짓밟은 당사자를 사법처리하겠다는 경찰 고위층의 방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경찰 내부의 반발을 이해 못할 건 없다. 단 그 폭력이 결코 옳지 않았다는 것, 다만 그러한 상황으로 내 몰았던 경찰 지휘부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이번 사태를 초래한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을 말단 경찰관이 몽땅 뒤집어쓴다는 점에서의 '이해'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

 

그렇더라도 '명령에 따라' 집회 해산을 유도하고 진압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에 대해 사법처리 운운은 지나치다는 것인데, 물리적 수단을 갖고 대항하거나 위협적인 행위를 한 것도 아닌 피해 여학생에게 그토록 가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도 소위 '정당한 임무 수행'인지 묻고 싶다. 과거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에게 가공할 폭력을 행사했던 계엄군들 역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죄 밖에 없다고 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50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독가스실에서 살해했던 이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따라서 비난받아야 할 자들은 히틀러와 그 일당일 뿐, 독일 시민 계급은 오히려 피해자였다는 사고가 전후 독일에서도 팽배했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고 고개를 숙였던 바이츠제커 대통령의 연설과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다"는 야스퍼스의 언명이 말해주듯, 이후 독일은 전쟁과 학살 책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하게 된다. 오늘날 독일이 국제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한스 요르크 잔트퀼러(독일 브레멘 대학교 교수)는 5·18민중항쟁의 보편적 의의의 근거가 시민들의 행위가 단지 그들의 고향 도시에 대한 애향심이나 단순한 반항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부 당국의 억압과 왜곡된 선전으로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항쟁의 성격을 매우 적확하게 규명한 바 있는 데, 필자는 그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현대적 테크놀리지를 동원한 살인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이 대량학살적 성격을 띨 때에만 경악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한다고 일깨운다. 따라서 폭력에 의한 단 한 사람의 죽음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한 한 사람의 죽음은 인간 전체에 대해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불의에 대해 저항하는 이는 개별적인 한 인간이다.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에서 죽는 이도 개개의 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의 권리를 위해 대표하여 행위하는 이도 역시 한 명의 개별적인 인간이다. 모든 인간의 개인성은 보편성을 띤다.

 

5·18민중항쟁 당시 하나가 되어 싸웠던 개인들, 노동자, 농민, 학생, 빈민, 종교인, 지식인 그리고 반정부인사들 모두가 각기 개인적 존재로서 폭력에 저항했고, 그들의 행위는 침묵했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진압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힌 한 여학생 역시 모든 이들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 여학생의 용서 표명은 그 자체로 성숙한 대응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 폭력을 다른 어떤 이유에서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끝도 없이 되풀이 해 온 국가 폭력의 악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촛불집회를 막아야한다고 선동하는 이도 있지 않은가.

2008.06.08 07:35 ⓒ 2008 OhmyNews
#국가 폭력 #시민 저항권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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