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둑에 만발한 금계국.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안병기
주불전 앞에 서 있었을 석탑과 당간지주 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점과 동종·관음상 등 출토 유물로 봐서 천흥사가 얼마나 규모가 큰 절이었나를 알 수 있다. 현재 천흥리 마을 전체가 절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렇게 큰 규모를 자랑하던 절이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폐사지로 나오는 걸까. 어쩌면 새로 개창한 조선 왕조에서 고려 태조가 창건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사시켰는지도 모른다. 정치란 얼마나 졸렬한 것인가를 상상하면 그럴 개연성을 아주 덮지 못한다.
도종환 시인은 '폐사지'라는 시에서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반드시/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길게 누운 채 마모되어 가는/ 돌부처들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하는 것들 가운데 권력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손에서 놓는 바로 그 순간,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일지라도 페허가 돼 버리는 것이다. 헛되고 헛된 것들의 첫머리에 권력이 놓여 있음을 고려 태조는 알고 있었을까.
마을을 나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석탑이 있는 곳에서 불과 10여 m가량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저수지를 만난다. 1959년 쌓은 천흥저수지다. 저수지를 만들면서 절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줄기차게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꼭 한 번 보여주었으면 싶은 곳이다. 이런 저수지 하나를 건설해도 이토록 피해가 막심한 것을….
저수지 둑에는 노란 황계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공작이국화 혹은 각시꽃이라고도 부르는 북아메리카 남부 원산인 꽃이다. 그러나 이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착화된 꽃이 돼 버렸다. 군데군데 젊은이들이 금계국 꽃 사진을 찍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저 자신이 꽃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금계국이여, 너무 아름답게 피지 마라. 젊은이들이 너무 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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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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