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거리에서 부르는 태평가

[작가회의, '촛불' 릴레이 기고①] 소설가 김이은

등록 2008.06.12 15:40수정 2008.06.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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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회식을 하는 대신 시청으로 발길을 모으고, 혹은 학업을 마치자마자 무거운 책가방을 멘 채 광장으로 모여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모인 많은 사람들은 절박하게, 혹은 흥겹게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냅니다. 자신들을 대신해, 자신들을 위해 일해주리라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거리에서 밤을 지샌 뒤, 직장으로 혹은 학교로 돌아갑니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한껏 깊어져가고 있지만 거리에서 밤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밤공기는 비정하도록 차갑기만 합니다. 그들은 오직 손에 촛불 한 자루만 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추위를 녹여주기에 한 자루 촛불은 작은 바람에도 너무나 가냘프게 흔들리기만 하지요. 그 가녀린 촛불들이 수천 개, 수만 개가 모여 어둔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 거 걱정없이 내 일 하고 싶을 뿐

"힘들고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생업에 지장이 있을텐데 왜 날마다 이곳에 나오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한 기자의 인터뷰에 사회 초년생쯤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집회나 시위에 참가해 보지 않았습니다. 평범하게 나고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이 년이 지나서야 겨우 직장을 얻었습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늘 야근하고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해 왔습니다.

하지만, 밥벌이에 온 신경을 쏟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저는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투쟁해서 명예나 부, 혹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즉 생존에 관한 중대한 사안에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을 쓰지 않아도 힘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땅히 거쳐야 할 올바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민 대다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은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갈 것입니다. 저는 다만 먹고 사는 거 걱정 없이 열심히 내 일을 하고 싶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에 대한 염원은 지금 뿐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 또한 모두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오래된 동양의 고사에 '평화로운 시절의 개가 될지언정, 난세에 사는 사람으로는 태어나지 않겠다'(寧爲太平拘 不作亂世人)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전설의 시대인 요(堯)임금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잠행을 나간 요임금의 시야에 농삿일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한 농부가 눈에 띄었습니다. 요임금이 "무엇이 즐거운가?"라고 묻자 농부는 요임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로만 "해 뜨면 일 하러 나가고 해 지면 들어와 쉬지요. 내가 내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내 밭을 갈아 식량을 일구거늘, 임금의 힘이란 게 있는 건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겠는지요"(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라고 대답합니다.

새로운 정치 지도자가 선출될 때마다 온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사람들이 인용하는 격양가(擊壤歌)입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요임금은 뒤돌아서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왜냐구요? 농부는 세상일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업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값지고 정직한 땀을 흘려 정당한 노동을 하는 대가로 자신이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므로, 별달리 임금이 통치 행위를 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최고 통치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겠는지요. 그것이 바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요임금이 바라던 통치였으니까요.

통치자가 통치할 필요를 못 느낄 때가 '태평성대'이거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업조차 뒤로 제쳐둔 채 거리로 나와 하고 싶은 말은, 물론 결과에 대한 실망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정에 대한 문제일 겁니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어떤 일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더불어 같이 가는 발전을 이룹니다.

세상 모든 일들에 반드시 같이 있게 마련인 상처들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감싸고 가는 것이지요. 연일 계속되는 촛불 시위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어떤 과정이 제멋대로 무시된 결과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깊어진 결과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김병기
'강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이 있지요.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각각 제 길을 가는 과정에서 무언가 어그러졌다면 다시 그 과정을 되돌아보고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버릴 줄 알아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성과 속죄 또한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서로에 대한 용서가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니까요.

다툼이 생겼던 상대를 서로 용서한 후에라야 또 같이 한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서 빨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에 힘쓸 수 있길 바랍니다. 촛불 시위 또한 그 과정 중 하나일 겁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이은

소설가. 200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작품집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김이은

소설가. 200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작품집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등이 있다.
#촛불문화제 #김이은 #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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