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라, 세자와 빈궁은 용서할 수 없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60] 환상 속에 만난 세자와의 해후

등록 2008.06.12 22:11수정 2008.06.1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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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지. 창덕궁 후원에 있다. ⓒ 이정근


시간이 얼마쯤 되었을까? 자시가 지난 지는 꽤 되었고 파루는 아직 멀었으니 야심한 밤이다. 백악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낙산을 향하여 달리다 잠시 쉬어가는 곳. 응봉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엉~ 부엉~ 기분 나쁜 소리였다. 침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소원 조씨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전하!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그래, 그런데 소원이 왜 여기에 있소?"


"전하께서 잠시 정신을 놓은 듯 하옵니다."
"나는 한 숨 잔 듯한데 그랬었구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인조는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어찌나 걱정이 되 온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원이 곁에 있었구려."

겨우 눈을 뜬 인조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소원 조씨가 잡았다. 차가웠다. 차가운 손을 여인이 감싸자 조소원의 뜨거운 체온이 인조에게 전해졌다. 인조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그려졌다.

"전하! 세자가 심양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하옵니다."
"그 소식은 나도 들어 알고 있소."
"책봉식에서 세자가 강사포를 입고 세자빈이 적의를 입었다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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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전. 심양 황궁에 있는 대정전은 소현세자가 책봉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 이정근


소원 조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강사포(絳紗袍)는 임금이 입는 옷이고 적의(翟衣)는 왕비가 입는 옷이다.

조선의 왕은 자신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중전이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여기에 살아있는데 세자와 세자빈이 심양에서 왕과 왕비의 복장을 하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창백하게 일그러지던 인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소원의 손을 잡고 있던 인조가 손을 놓았다. 놓았다기 보다도 근육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힘들게 받치고 있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편안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구름을 타고 가는 듯했다. 산도 없고 내도 없고 바다도 없었다. 끝이 없는 현황(玄黃)을 나는 것만 같았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앞서가는 사람도 없다. 얼마쯤 갔을까. 장승 같은 사람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붉은 옷을 걸친 바위같이 큰 사람이었다. 자세히 바라보았다. 소현이었다.

환상 속에서 만난 아들 소현세자, 그러나 실망스러웠다

"네 놈이 기어코 오랑캐가 시키는 대로 왕의 옷을 입었다더냐?"
"아닙니다. 아바마마. 저들이 강사포를 입어라 했지만 소신이 물리치고 오장복을 입었습니다."

소현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용골대가 찾아와 강사포를 입어라 강요했지만 한사코 물리치고 칠장복도 아닌 오장복(五章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빈궁의 적의는 무엇이더냐?"
"마땅한 예복을 구할 수 없어 마지못해 입었으나 오조룡보를 떼고 사조룡보를 붙였습니다."

"듣기 싫다. 오랑캐의 주구가 되는 것도 역겨웁거늘 적의를 입었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아바마마 오해이십니다."

"닥쳐라. 세자와 빈궁은 용서할 수 없다."
"아바마마.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타고 가던 구름이 갑자기 수천 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깜짝 놀란 인조가 팔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임금의 헛소리

"닥쳐라. 용서할 수 없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혼수상태에 빠진 인조를 바라보던 소원 조씨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혼절했던 사람이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물, 물을 가져와라. 목이 마르다."

나인이 대령한 물을 마신 인조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전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내가 꿈을 꾼 모양이로구나."

꿈이 아니었다. 혼수상태에서 소현세자를 만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들을 만났지만 애틋한 심정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으로 만난 것이다. 현실과 환상은 분명 다르지만 증오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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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위군.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 ⓒ 이정근


궁궐 숙위군을 손아귀에 넣은 소원 조씨는 훈련원 군관들에게도 손을 뻗히고 있었고 심양에도 자기 사람을 심어놓았다. 심양관에는 빈객과 익위사 관원들뿐 만아니라 사서와 보덕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합하여 2백여 명의 관원들이 있었다.

심양관에서는 공식적으로 '심양일기'를 썼고 조정에 보고 할 일은 '심양장계'를 썼다. 심양에서 볼모생활 하고 있는 소현세자는 물론 세자빈과 봉림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은 투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동태는 공식적인 장계를 통하여 인조에게 보고되었고 은밀한 경로를 통하여 소원 조씨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때는 임금보다도 먼저 조소원에게 전달된 경우도 있었다.

종각에서 서른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파루(罷漏)다. 통행금지가 풀렸으나 도성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삼개나루에서 수레를 끌고 와 숭례문 밖에서 기다리던 새우젓 장사도 없었고 삼전나루를 건너와 흥인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전관원에서 잠을 자는 부보상도 없었다. 임금이 혼절했다니 도성 민심이 흉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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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대소신료들의 출입문이었던 금호문이 굳게 닫혀 있다. ⓒ 이정근


어둠이 물러가고 동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승정원에서 아뢰었다.

"인평대군과 능원대군, 영상을 비롯한 좌상과 우상 그리고 도승지 이기조가 모두 궐문 밖에 와 있습니다."

"들라 이르라."

금호문이 열리자 궐 밖에서 날밤을 새운 대소신료들이 편전으로 몰려 들어갔다.

"전하! 어인 일이시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인조의 환우를 걱정했다.

"어의는 어디가고 네가 있느냐?"

의원 이형익을 발견한 능원대군이 힐문했다.

"의원은 소신이 불렀습니다."

이형익을 제쳐 두고 소원 조씨가 되받았다.

"어의를 두고 의원을 부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법도보다도 전하의 용태가 더 중요합니다. 전하의 옥체는 소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환우에 맞는 치료를 하기 위하여 의원을 부른 것입니다."

"아무리 용태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어의를 배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 어의가 들도록 하명하여 주십시오."

임금의 몸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소원 조씨의 당돌함에 기가 질린 능원대군이 아우님에게 하소연 했다. 능원대군은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조의 친형이다.

"어의가 보내오는 죽력을 먹고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죽력(竹瀝)도 이형익이 내린 처방이다. 어의는 임금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시골 의원이 옥체를 지키고 있으니 뭐가 뒤틀려도 한참 틀어져 있다. 궁궐을 감싸고 있는 치맛바람은 거세었다. 미풍으로 시작한 바람은 이제 세력을 얻었다. 구름은 바람을 부르고 권세는 바람을 부른다던가. 치맛바람을 맞으려는 세도가들이 소원 조씨의 치마 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 때였다. 심양에서 출발한 급주마가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급히 전하라는 장계를 가지고 온 것이다. 심양 재신 신득연이 보낸 밀계(密啓)였다.
#창덕궁 #대정전 #소현세자 #금호문 #숙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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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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