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은 어머니 제삿날이어서 고향(군산)에 다녀왔습니다. 제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2년째 형님댁에서 모시고 있는데요. 돈도 벌지 못하면서 고향 방문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는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로 가난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던 세대입니다. 그런데 부자도 훨씬 많아졌고, 제사도 남에게 맡겨 지낼 수 있어 편리해진 요즘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해진 것 같아 안타깝더라고요.
부산을 출발할 때는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군산에 도착하니 비가 멈추었고, 강바람을 타고 오는 째보선창의 짠 냄새와 구수한 흙냄새가 버스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더군요.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습니다.
2개월 만에 만날 아내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습니다. 군산에 살 때는 제사 하루 전부터 음식을 장만하러 형님댁으로 가야했던 아내였는데, 부산으로 이사 오고부터는 손님이 되어버렸습니다. 혼자서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형수님(66세)께 죄송할 따름이지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아내는 생일날 아침에 축하는커녕 아침부터 형님댁으로 음식을 장만하러 가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보다 생일이 하루 빨라서 '개 보름 쇠듯'했지요. 그래도 불평 한번 하지 않던 아내였는데 벌써 예순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늙어가는 아내를 탓해야 할지 빠른 세월을 탓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형님댁 가는 길은 여전히 골목길이고 뒷골목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있습니다. 지금은 헐려 일제잔재로 남아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지은 정미소 창고를 끼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954년에 옆 동네에서 이사를 왔는데 형님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어 돌아가신 부모는 물론 형제들의 혼이 서린 집이기도 합니다.
옛날의 골목은 허름한 양철지붕과 기와집이 길게 어깨동무를 하며 한집처럼 붙어살았습니다. 뒷골목에는 공동 우물이 있어 식수는 물론 동네 사람들의 빨래터이기도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이 목욕하는 장소로 변했는데,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안으며 훔쳐보던 그때가 새롭습니다.
저희 집 앞마당에도 샘이 있어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가물어 식수가 부족할 때는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신작로 건너 공설운동장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빙수나 얼음물 장사들이 성가시도록 찾아왔지요.
운동장은 할아버지들이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시조를 읊곤 했는데, 술래잡기할 때 도피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들 옆에 앉아 있으면 술래가 알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열대야와 모기에 시달리던 동네 사람들이 시원한 바람이 부는 운동장에 가마니와 자리를 깔고 여름밤을 나기도 했는데요.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에는 중국집에 불난 것처럼 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골목 두 번째 집인 명묵이네와 뒷골목에 사는 길례 아버지가 나무장사를 했는데,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관솔 향이 그윽한 소나무와 긁어모은 낙엽 덩어리가 노적가리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의 황토와 은은한 관솔 향이 저를 등산 마니아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제빙공장에 다니는 정복이 아저씨 인기가 제일 좋았습니다. 선창가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얼음 덩어리를 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음을 얻어오면 잘게 쪼개 수건에 싸서 더위도 식히고, 보릿가루에 당원을 타 먹거나 얼음물을 만들어 먹기도 했거든요.
뒷골목 우물 앞에 살았던 대곤이네는 딸이 여섯이어서 딸 부잣집으로 불렸습니다. 대곤이 아버지는 전기회사(한전) 수금사원이었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수금을 조금밖에 못 한 날에는 골목 입구에서부터 알아듣지 못할 욕과 고함을 지르며 들어왔는데, 기분이 좋은 날은 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끌고 오셨습니다. 부엌에서 저녁밥을 하던 막내 누님이 대곤이 아버지 노래를 듣고 “노래하면서 오시는 걸 보니 대곤이 아버지, 오늘 수금 많이 했나 보다”라고 해서 식구들이 웃기도 했습니다.
골목길이 시작되는 큰 길가에서 라이터와 만년필 등 만물상을 하시던 영태 아버지는 전직 경찰이셨는데, 작은아들 길태가 한쪽 발을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영태 아버지는 몇 년 동안 동네 반장을 했는데, 아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는지 성질이 괴팍했습니다. 길태가 놀다 싸우기라도 하면 쫓아와 전후 사정을 물어볼 것도 없이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들을 때렸습니다.
“야이, 빙신아! 못 이기는 애들허고 놀지 말라고 혔는디 왜 자꾸 놀아 이놈아! 이길 힘도 없는 것이···.”
동네 사람들은 길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길태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조심했습니다. 어쩌다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영태 아버지의 눈치를 봤습니다. 그래도, 동네 길·흉사(吉·凶事)가 있으면 제일 먼저 나서서 거들어주고, 정이 많아 인심은 잃지 않고 지냈습니다.
길만이 아버지는 키가 작은 삼류 목수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시원한 대나무 평상을 하나 부탁하셨는데, 어느 정도 완성될 무렵, 어머니가 평상 길이가 너무 짧다고 하자, 키가 작은 길만이 아버지는 누워 보이며 짧지 않다고 자꾸 우기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 대나무 평상은 지금도 형님댁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고물상을 하시던 영철이,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로 시작되는 파월장병 노래와 새마을노래를 잘 부르던 승구, 창현이, 완기, 어머니가 길가에서 뽑기와 설탕과자, 찐 고구마 등을 팔던 귀철이와 귀성이 형제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합니다.
조금과 사리를 가리지 않고 비린내가 풍기던 째보선창, 운동장 옆의 기찻길, 그 옆에는 공설시장이 있어 매일 시골에서 장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대곤 했습니다. 공설운동장에서는 해마다 설 명절을 전후해서 서커스공연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강가 갯벌에서 농게, 짱뚱어를 잡고, 위험도 모르고 철길에서 공깃돌을 줍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동네 옆에 논이 있었는데, 송사리를 잡아 고무신에 담느라 남의 모판을 망쳐놓기도 했고, 여름방학 때 수박과 참외를 서리하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진짜 고향은 가슴에 남아 있는 '골목길 추억'
골목길이 가까워지자 옛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음식 솜씨도 으뜸인데다 나눠 먹기를 좋아하던 넉넉한 어머니의 손이 그리워집니다. 어머니는 동네 개구쟁이들에게는 호랑이 할머니로 통했으나 어른들에게는 인심이 좋고 덕이 많다는 말을 듣고 사셨습니다.
일 년이면, 설날과 추석명절, 정월에 하는 독경, 매달 음력 초사흘마다 지내는 고사와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로 떡과 부침개를 하는 날이 많았는데, 저는 신바람이 났고, 음식을 만들 때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며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다음날 아침은 정신없이 심부름하러 다녔습니다. 자상한 어머니는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도, 가족의 숫자와 가난을 고려했는지, 집집이 쟁반 크기가 달랐습니다. 신문지로 덮은 쟁반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는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골목 어귀에 다다르니 길 건너 튀밥(뻥튀기) 집에서 일하던 인식이형이 생각납니다. 제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불러서 금방 튀어낸 강냉이를 퍼주곤 했거든요. 저를 무척 귀여워했던 형이었는데···.
초여름 한낮 더위를 식혀주는 저녁 햇볕이 한쪽 구석을 비추고, 그늘진 골목의 쓸쓸함을 덜해주려는지 제법 온기가 스밉니다. 비석 치기와 자치기를 하던 옛 추억과 함께 옆 골목에 살던 정선이 자매와 길례의 옛 모습이 떠오릅니다. 길례는 가난에 기가 죽어서인지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요. 누더기가 된 치마를 입은 동생과 몸을 기대고 앉아 우리가 노는 모습을 구경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길례네가 불쌍하다며 먹을거리를 남겨 자주 보내주셨는데, 이렇게 옛 추억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훌륭한 어머니를 둔 저의 복이겠지요.
옛날에 살던 어른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코흘리개 친구들도 모두 동네를 떠났는데 형님만이 55년째 골목을 지키고 계십니다. 대문 앞에 서니 저도 모르게 ‘옛날 친구들이 지금도 골목에서 같이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소리가 나오면서도 가슴에 남아 있는 ‘골목길 추억’이 진짜 고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008.07.07 17:57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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