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름이 불려지는 쿠바노들을 만나다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해 편 2] 쿠바 ② 드디어 출발선상에 서다

등록 2008.07.12 17:03수정 2008.07.16 11:36
0
원고료로 응원
a

Capitolio Nacional 뒷풍경 뒤로 건물들이 수리되고 있다. 쿠바의 건물들은 대개가 낡아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닌 여행자들에게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움으로 다가와 더 특별하게 보인다. ⓒ 문종성

"안.뇽.하.세.요.저.는.애.리.입.니.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을 하는 열여섯 살의 소녀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반가웠는지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말 잘하는구나."
"아니요, 조금. 한글학교에서 배웠어요."

6월 8일. 정오의 햇살이 웃음마저도 그을려버리는 아바나 뒷골목. 까삐똘리오(Capitolio) 바로 뒤편에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현지인 교회가 위치해 있었다. 나와 준호는 예배시간보다 조금 늦게 교회에 도착했다. 빈자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나는 준호와 따로 앉게 되었다.

예배 형식은 어느 나라를 가든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아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순서가 스페인어로 진행되었으므로 나는 설교 시간만큼은 감에 의존해야했다. 순서 순서 마디에는 눈치껏 옆 사람을 따라 행동했는데 내가 언어가 서툰 것을 알았는지 친절하게도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웃으면서 조목조목 가르쳐주었다.

쿠바 교회의 예배에는 정치나 경제 얘기를 하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더욱이 쿠바인들에게 종교는 그 기능이 가지는 것을 종종 발휘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식량이 배급되는 대신 너희에게 신이 필요하냐'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고개를 저을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종교가 가지고 있는 모임이나 구제, 그리고 영적인 필요도 해결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미 견고하게 형성된 생활이나 사고방식을 특별한 사건이나 충격이 없는 이상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다.


a

쿠바 현지교회 쿠바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종교의 자유는 정부 관리 아래 허용되고 있다. ⓒ 문종성


나라에서 먹고 자는 모든 문제(물론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남들도 다 비슷비슷하니 상대적 박탈감은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다)를 해결해 주고, 치안도 상당히 안전하고,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서 그런지 지금 상태로도 큰 불만이 없는데 종교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부분까지 체크하는 관심을 가질 그런 갈급함은 깊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시스템으로 철저하게 체계화된 나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필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또한 국가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특별한 혜택 같은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산이 적고, 다른 행사를 치르거나 규모가 큰일을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원래는 현지 젊은 목사님이 있어 예배를 진행하지만 오늘은 다른 여자가 나와 아주 열정적인 설교를 토해내고는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예배가 끝난 후 난 이방인 손님이라는 프리미엄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친근한 인사를 건네받았다. 그중에는 뺨을 갖다대며 키스를 건네는 부류도 있었고, 간단한 악수로 환영표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계 쿠바노를 만나다

a

한국계 쿠바인 이세리, 이영순 할머니, 그리고 성애리. 이들은 아직도 별도의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다. ⓒ 문종성


a

목사님 가정 목사님의 이름 역시 다비드 리. 그의 아내 이름은 이소라다. 딸 세리와 함께. 모두 3~4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가 한국인이다. ⓒ 문종성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와, 한국?"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화색이 돌며 더욱 크게 반겼다. 미간이 넓은 내 인상을 보고는 당연히 중국사람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얘기를 즉석에서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한국 사람이에요!"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는 한국계 쿠바노였던 것이다. 이 교회의 목사님 이름이 다비드 리, 그의 아내 이름은 이소라. 사진을 찍었던 두 꼬마 숙녀는 사촌지간인데 애리와 세리이고, 애리 할머니 이름은 이영순이란다.

할머니는 한국인의 외양이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언어는 스페니쉬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 후 세대로는 점차 외양까지 라틴계열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후예들로서 이들은 조금이나마 한국어를 할 수 있었고 또 배우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쿠바는 어떻게 방문하게 되었어요? 학생이세요?"
"아니요, 여행 중이에요. 자전거로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아마도 3주 후에 떠나기 전에 다시 오게 될 것 같아요."
"아, 그럼 3주 후에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

a

패셔너블 할머니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환하게 웃는 할머니의 패션이 화려하다. ⓒ 문종성

호기심 많은 10대 소녀인 애리는 수줍은 채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쿠바라는 닫힌 세계에서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강렬할까. 더구나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들어온 환상 가득한 한국에서 왔다는데 미지에 대한 동경은 끝이 없을 성싶었다.

한국말을 조금 섞어가며 조심스레 말하는데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와중에 보이는 덧니와 보조개가 퍽도 예쁘게 보였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핏줄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니 눈동자에 어딘지 모를 서글함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더 정이 갔다.

우린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더 이상은 대화 나누기가 힘들었다.

"또 봐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애리는 너무나 짧았던 만남이 아쉬운 건지 시원하게 배웅 인사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식사라도 같이할 생각으로 그만 길을 나서야 했다.

자본주의 입김이 곳곳에 스며든 쿠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말레콘 주변을 훑어보았다. 나중에 다시 찬찬히 살펴볼 계획이지만 쿠바는 체감 상으로도 상당히 변화된 듯했다. 아바나에는 이미 자본주의 입김이 곳곳에 스며 들어왔고, 시민들은 돈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어떤 관광객이 몹쓸 버릇을 심어 주었는지 사람들은 사진기만 들이대면 초상권을 들먹이며 "1달러!"를 단호하게 외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주차비란 개념도 없던 나라에서 불과 2~3년 전에는 25센트의 주차료를 부르고 어느새 1달러를 요구하는 풍토로 바뀌었단다.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시장 경제 시스템이 곳곳에서 보인다. 여기저기 흥정이 오가고, 서비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며, 화폐 가치에 따라 서비스의 차원도 달라진다. 최소한 관광객을 상대로 한 모든 서비스는 돈을 매개로 가치가 정립된다. 또한 수입의 적지않은 퍼센티지를 관광으로 얻기에 관광객들에게 함부로 하지도 못한다. 오죽하면 현지인은 제한을 당하는 관광객 출입전용 지역까지 있겠는가.

보통 쿠바인들이 한 달 임금이 10~20달러 정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관광객은 단 하룻밤을 자는데도 그들의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해 버리니 이들의 주머니를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들은 초기 자본주의가 겪었던 현상들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다.

이를테면 나라에게 책정한 액수보다 더 많은 비용을 외국인에게 청구해 그 차액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든지 아주 순진하게는 거스름돈을 일부러 적게 주며 그것을 실수로 포장하는 것이다. 대개는 적은 단위의 돈을 먼저 거슬러주고 큰 단위의 동전은 손에 쥐고 있다가 손님이 모르고 넘어가면 그대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이고, 손님이 이상하게 여겨 지적하면 손에 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주면 되는 것이다. 주로 나 같은 여행자들에게 아주 흔하게 쓰는 고전적인 수법 중에 하나다.

a

아바나 뒷골목 좁고 어두우며 어지러운 아바나의 구시가지로 춤과 음악과 담배만으로도 풍족한 인생을 즐기는 낙천적인 쿠바노들의 보금자리가 보인다. 물론 가난이라는 그림자를 뒤로 숨겨놓고서. ⓒ 문종성

"그뿐인 줄 알아요? 차량 부품이 고장 나서 수리를 맡기면 다른 차에서 훔쳐 온 부품으로 수리를 대신하고 대신 청구서에다가는 새 제품을 쓴 것처럼 허위작성해 차액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구요.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클럽이나 레스토랑 등지에서 호객행위를 해 몸 파는 아가씨들은 일반 노동자보다 몇 배는 더 벌 텐데요."

중남미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자주 들어 본 래퍼토리가 여기 쿠바에서도 똑같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소도시나 시골 사람들은 먼저 자본주의에 맛을 들인 대도시나 관광도시 사람들의 변화를 보며 어떻게 현실을 바라봐야 할지 아직은 혼란스러워하는 상태지요.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유학 코스인 러시아를 갔다 오면 뭐해요? 그래서 좋은 직업을 얻으면? 그래 봐야 월급이 고작 몇십 달러 안 되는데. 터놓고 얘기해서 나라에서 보장해 주는 직업보단 검은돈을 버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죠. 그런 면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장사하거나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꽤 짭짤할 겁니다."

아바나에서 사업을 하신다는 한 한국분의 설명에 그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피델 이후 라울이 여러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국민이 차츰 사유 재산에 눈을 떠가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자본주의는 알고도 모른 척 쿠바 경제를 잠식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월급이 기껏해야 20달러도 안 되는 나라에서 TV나 냉장고는 다들 기본이고 심지어는 게임기나 차까지도 가지고 있어요. 핸드폰 구입이 얼마 전부터 이뤄지긴 했지만 그전에도 부잣집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핸드폰 구입해 가지고 다녔지요. 그럼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나요? 물론 미국의 가족에게서 받는 돈도 있겠지만 실제로 쿠바 지하에는 엄청난 검은돈들이 몰려 있는 거예요. 쿠바를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지하 경제라고 봐야죠."

그랬던 쿠바가 이젠 그 돈들에게 빛을 비춰주려고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쿠바라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사회주의 노선을 지켜가며 적정량의 자본주의를 융합시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불만세력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쿠바의 돌파구가 궁금해진다.

a

게임을 즐기는 노인들 거리에서 도미노 게임을 즐기는 동네 주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 문종성


a

말레콘 풍경 아바나의 유명한 방파제인 말레콘에서 한 남자가 실을 꿰며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다. ⓒ 문종성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헤어스타일과 패션스타일로 거리를 활보한다. 이것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대신 정책을 크게 흔들 사안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참여의 자유는 없다고 봐야 한다.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경찰이 있기에 시위는 언감생심이다. 물론 그 후광으로 범죄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소임이 분명하다.

범죄에 대한 얘기라 생각난 건데 언젠가 피델은 죄수들은 풀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죄수들이 미국으로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범죄기록이 탄로 나지 않기에 그들은 거기로 도망을 치고, 쿠바정부는 범죄자들 먹여 살릴 경비를 줄이고, 나라는 안정되고.

게다가 미국으로 도망간 쿠바노들이 쿠바의 가족들에게 달러까지 송금하니 쿠바 경제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만은 확실한 셈이다. 범죄자들을 풀어주어 1타 4피의 효과를 보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얘기다. 하지만 아직 쿠바에 대한 재미난 얘기는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을 거라고 본다.

모든 준비 마쳤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a

쿠바 아이들 백인과 흑인 아이가 함께 북을 치며 놀고 있다. ⓒ 문종성


예배 후 준호와 처음으로 12km 정도 달리며 자전거를 시험해 보았다. 준호는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설어한다. 짐 없이 시원한 바람 맞으며 가는데도 뒤뚱거리며 제 무게를 인 좁은 안장 위에서 균형 맞추는 게 힘겹게 보였다. 당장 내일부터 짐 싣고 더운 날씨에 도로를 달리려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준호는 자신에게 채근하거나 조언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나이로 스물 두 살이니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언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수위를 낮춰 하리라 마음먹지만 위계질서가 분명한 토종 한국산이기에 가끔 형식에 갖춰진 틀을 미리 제시하고 따라주기를 바라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런데 준호는 그것은 군대식이 아니냐며 강한 저항심을 보인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또 원칙을 원하기도 한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지침을 달라는 것이다.

이때 나는 혼란스럽다. 둘 다 비슷한 맥락인데 준호가 보이는 반응은 전혀 다를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준호가 나에겐 대인관계를 보다 깊게 발전시키기 위한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대하며 가야 할 지 고민이지만 일단 뭐든지 준호가 하자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최소한 그의 행동반경은 내가 쫓아갈 수 있거나 포용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 출발하려고 했던 것을 우리는 더운 날씨에 출발하기가 부담스러워 하루 더 있다 떠나기로 했다. 준호에게는 하룻밤 더 자는 동안 긴장을 풀고 자전거 여행 도전에 대한 담대한 마음이 더 영글어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날이 밝는 대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드디어 출발선상에 선 것이다.

a

모로 요새 바다를 바라보는 하나의 성처럼 아름답다. ⓒ 문종성


1603년 해적들로부터 아바나를 보호하기 위해 철옹성의 모로 요새가 세워졌다. 이 요새를 건설했던 이탈리아 건축가 보티스타 안토넬리(Bautista Antonelli)는 '이 언덕을 점령하는 자 아바나를 가질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1762년 영국의 원정대가 아바나를 공격했다.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모로 요새는 마침내 함락되었고 안토넬리의 말대로 영국은 아바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모로 요새를 손에 넣었다고 해서 곧 아바나를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병력이 증원되고 모로 요새의 포신을 아바나로 돌려 포격을 퍼부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말라리아와 황열병과 싸워야 했고, 아바나를 함락했을 때 절반으로 줄어든 원정대의 수는 그 뒤로도 계속 줄었다.

17개월 뒤 영국은 쿠바를 플로리다와 바꾸기로 스페인과 타협했고 아바나에서 물러갔다. - 유재현 <느린 희망>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체게바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자전거는 자전車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사 탄핵' 막은 헌법재판소 결정, 분노 넘어 환멸
  2. 2 택배 상자에 제비집? 이런 건 처음 봤습니다
  3. 3 나이 들면 어디서 살까... 60, 70대가 이구동성으로 외친 것
  4. 4 윤 대통령 최저 지지율... 조중동도 돌아서나
  5. 5 서울 사는 '베이비부머', 노후엔 여기로 간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