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고 5시간 15분... "드디어 육지다"

[더불어 함께 입학식] 최서남단 '나홀로 입학생' 지오의 뭍 나들이

등록 2008.07.19 17:56수정 2008.07.22 15:31
0
원고료로 응원
a

신안 가거도항을 출발해 하태도·상태도·흑산도·비금도를 거쳐 목포항으로 들어오고 있는 쾌속여객선. 무려 5시간 15분 동안 달려온 탓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 이돈삼


2008년 7월 18일 오후 5시 45분. 다도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뱃길이 시작되는 목포항 연안여객선터미널.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한산한 모습이다. 섬으로 떠나는 여행객들이 표를 사고 배를 타기 위해 발 디딜 틈없이 북적이던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 뒤라 하늘이 드높다. 햇볕도 찌는 것처럼 뜨겁다.

쾌속선 한 척이 항구에 닻을 내리기 위해 서서히 방향을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최서남단 가거도를 출발한 '지오'가 타고 오는 배다. 문지오(8) 어린이는 지난 3월 전남 신안군 가거도초등학교에 입학한 '나홀로 입학생'으로 '더불어 함께 입학식'에 참가하기 위해 뭍으로 나오는 길이다. 12시 30분 가거도항에서 배에 탄 지오는 하태도·상태도·흑산도·비금도·도초도를 지나 5시간 15분 동안 뱃길여행을 한 것이다.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자 승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온다. 가슴에 여행사 명패를 단 단체여행객이 눈에 띈다. 대부분 흑산도에서 나오는 여행객들이다. 낚싯대를 담은 기다란 가방을 짊어진 강태공들도 흐뭇한 표정이다. 손맛을 제대로 본 모양이다.

지친 표정의 한 아주머니 여행객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혼잣말로 "드디어 육지다"하고 내뱉으며 긴 숨을 몰아쉰다. 섬을 동경했는데 배멀미를 한 탓에 금세 육지가 그리워졌단다.

a

쾌속선에서 내려 부잔교 위를 걸어나오고 있는 지오네 가족. 배낭 하나씩 메고 손에도 짐 하나씩 들고 있다. ⓒ 이돈삼


"장수풍뎅이가 배멀미 할까봐 걱정됐어요"

북적거리는 여행객들 사이로 지오가 보인다. 엄마(한희숙·37)와 누나(은실·11) 그리고 여동생(지운·4)이 나란히 걸어 나오면서 배에서 시작된 수다를 잇고 있다. 각자 등에는 가방 하나씩을 메고 있다. 엄마는 커다란 것을, 아이들은 체구에 맞는 자그마한 것을 하나씩 멨다. 며칠이 될지 정확히 모를 뭍 나들이에 필요한 옷가지가 담겨 있다.

지오 손에는 자그마한 곤충 상자가 하나 더 들려 있다. 안에는 장수풍뎅이 두 마리가 들어 있다. 뭍으로의 여행에 동행한 장수풍뎅이를 가리키며 무엇인지 물었더니 동진이한테 선물할 것이란다.


동진이는 지난해까지 지오와 유치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지난겨울 아빠를 따라 충청도로 이사를 했다. 서울 가는 길에 들러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장수풍뎅이 한 쌍을 선물로 주려고 가져왔다는 것이다. 배 안에서 "장수풍뎅이가 멀미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됐다"는 말에서 섬 아이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도시의 학교에서는 친구가 전학을 가면 그걸로 끝나기 십상인데 이들의 정은 그만큼 애틋한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외롭고 또 친구가 그리웠으면 그럴까 싶기도 했다.

a

배에서 내려 장수풍뎅이를 데리고 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지오. 장수풍뎅이가 배멀미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했단다. ⓒ 이돈삼


엄마는 또 다른 여행객의 손을 빌려 하얀 스티로폼 상자 큰 것 하나를 들고 나온다. 목포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가지고 갈 것이란다. 안에는 가거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간재미와 광어 몇 마리가 들어있다. 지오네는 뭍에서의 첫날밤을 외가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지오네의 뭍 나들이는 올 들어 두 번째. 방학이면 한번 꼴로 나오는데 이번에는 서울을 가기 위해 방학도 하기 전에 일찍 나오게 됐단다. 학교의 여름방학은 24일부터인데 체험학습 신청을 해서 먼저 방학을 시작했다. 지오는 서울구경이 처음이라고 했다.

여객선터미널을 빠져나온 지오가 분수대 있는 유달산 공원(어민동산)에 가자고 엄마를 보챈다. 유달산 공원은 지오의 외가로 가는 길목에 있다. 누나와 동생도 지오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 다수결에 따라 1차 목적지가 결정되었고 안내는 엄마의 몫이 됐다.

차를 탄 지 10분도 채 안 돼 공원에 도착한 지오는 안내판을 휙 훑어보더니 바로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체육시설이 설치된 곳은 지오의 놀이터가 됐다. 철봉처럼 붙잡고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운동기구도 만져보는데 맘처럼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a

목포 유달산에 있는 체육시설을 놀이터 삼아 놀고 있는 지오네 가족.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섬은 신안군 압해도이다. ⓒ 이돈삼


a

소금쟁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지오. 가거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신기해 하는 표정이다. ⓒ 이돈삼


"멀미를 많이 해서 배 타는 게 무서워요"

그 옆 조그마한 연못에 선 지오가 연신 손가락질을 해댄다.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봤더니 소금쟁이다. 가거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금쟁이를 보고 신기해했다. 그 소금쟁이를 따라 연못을 두 바퀴 돌았다. 마음으로는 직접 소금쟁이를 잡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운 듯했다.

그것도 잠시. 지오는 그 옆으로 난 가파른 돌계단을 뛰어오른다. 뒷 모습이 마치 야생마 같다. "저러다 다치지 않을까요?" 했더니 "평소 산세가 험한 독실산(가거도에 있는 높이 639m의 산)을 오르내리고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게 체질이 된 '촌놈'이어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엄마의 얘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녀온 지오의 온몸이 땀으로 범벅됐다. 그래도 마냥 신난 표정이다. 약수터를 발견한 지오는 물 한 되박을 담더니 바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에 끼얹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몇 번 털어버린다. 꽤 더웠던 모양이다. "웃옷 벗을래? 아저씨가 등에 물 끼얹어줄게"라고 물었더니 망설이는 기색 없이 웃옷을 벗어젖힌다.

a

머리에 물을 끼얹은 지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 이돈삼


등목을 한 다음 나무벤치에 앉아 한두 마디 이야기를 하는데 지오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된다. 그 시선을 따라갔더니 대형 풍향계가 서 있다. '과학에 관심이 높다더니 허튼 말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놀이기구 같아요. 저기 타면 재밌을 것 같은데…"라고 한다. 풍향계를 보고 놀이기구를 떠올린 지오의 말에 역시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어른들의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다.

"지오야! 너는 배 타면 멀미 안 하겠다. 아저씨는 멀미하는데."
"멀미 많이 해요. 저는 배 타는 게 무서워요."
"아니, 섬에 살면서 배멀미를 심하게 하면 어떡하냐?"
"전 배 타는 거 싫어해요."

사실 지오는 배멀미를 심하게 한단다. 오죽 멀미를 심하게 하면 육지 나들이를 무서워한다고 했을까. 그래서 뭍으로 여행하는 날에는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고. 배 안에서 토해내면서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고통을 잘 아는 지오이기에 배를 타기 전에는 스스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멀미를 하지 않았고 배 안에서 라면도 먹었단다. 먼바다에 파도가 없어 배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가 밤새 바다를 다림질했다고 했어요.(웃음) 파도가 일어나지 말라고…."
"태풍이 오기 전날 바다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거든요. 태풍 '갈매기'가 온다는데, 내일이면 파도가 심했을 거예요. 아마 섬에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오와 지오 엄마의 얘기다. '태풍전야'라는 게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런 평온한 바다를 보고 섬사람들은 "장판"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a

유달산 어민동산을 제집 안마당처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지오와 은실이. 가거도에서 단련된 몸이란다. ⓒ 이돈삼


이젠 외가에 갈 시간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들어가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일 터. 지오의 외가는 공원에서 지척이다. 아이들이 대문 앞에서 "할머니"를 부르니 외할머니가 나와 손자·손녀를 반갑게 맞아준다. 인사를 끝내자마자 샤워를 한 지오. 금세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만화영화를 본다.

"무슨 프로그램을 좋아하니?"하고 물었더니 "도라에몽이요"라고 한다. "너도 진구를 좋아하는구나" 했더니 "아니요. 진구는 말썽쟁이여서 싫어하고 도라에몽 좋아해요"라고 한다.

"지오야! 할머니 사시는 목포가 좋아? 아니면 가거도가 좋아?"

질문을 던져놓고서도 당연히 "가거도가 더 좋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목포가 더 좋아요."
"왜?"
"배를 탈 필요가 없잖아요."

정말 배멀미를 심하게 하는 모양이구나 싶다. 저녁에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지오. 모처럼 나온 뭍에서 자장면도 실컷 먹고,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느새 캄캄해진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비가 많이 내리려나. 지오가 즐겁게 뛰놀려면 큰 비가 내리지 않아야 할 텐데….

a

18일 오후 가거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서 목포로 나오는 승객들이 생선 담은 스티로폼 상자를 들고 배에서 내리고 있다. 이 배는 정원 350명을 모두 채웠다. ⓒ 이돈삼


지오가 살고 있는 가거도(可居島)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떠있는 섬이다. 한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소흑산도'라 불렸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라는 행정지명을 가지고 있다.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145㎞, 뱃길로는 233㎞ 떨어져 있다. 뭍의 눈으로 보면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뱃길임을 감안하면 멀고도 먼 섬이다.

홍도에서도 중국 상하이 쪽으로 80㎞나 더 떨어져 있어 중국의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국전쟁도 소식으로만 듣고 지나갔다고 한다. 동경 125도7분, 북위 34도4분. 면적 9.18㎢에 해안선 길이 22㎞. 현재 290가구, 500여 명이 살고 있다.

가거도는 지금까지 홍도의 명성에 가려 관광지로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풍광이 홍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섬다운 맛은 그보다 더하다.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인심도 후덕하다. 수심이 깊고 해저가 대부분 암초 지대로 이뤄져 있어 우리나라 갯바위의 보루다. 섬 자체가 후박나무 군락지이기도 하다. 음양곽, 목단피 등 희귀약초도 자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 흰날개해오라기, 바다직박구리 등 희귀 조류가 서식하는 자연의 낙원이기도 하다.


#나홀로 입학생 #문지오 #가거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 어머어마하구나
  4. 4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5. 5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