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90] 식민지 조선의 퇴폐풍조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20 12:51수정 2008.07.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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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이중성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이라는 추악한 쿠데타에 참여한 후 미국으로 도망갔다 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화 동지도 잘 아는 사실일 겁니다. 독립협회에는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임원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의 작위를 받은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정화 동지의 시아버님처럼 작위를 받으시고도 훗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상해로 가신 예외도 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란 것이 있었습니다.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군중 집회였지요. 이상재가 사회를 보고 윤치호가 열변을 뿜었습니다.

"이 나라가 칭제 건원하고 국호도 대한이라 하여 세계만방에 자주 독립을 선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궁정에는 아직도 간신 소인배가 넘나들며, 정부는 철도 광산 산림 등의 국가 권익을 외국에 양도하는 데 바빴고, 증회 수뢰 매관매직은 날로 더할 뿐이다. 이같이 하고서 도탄 속에서 헤매는 국민을 어찌 구제할 것이며 누란의 국운을 그 어찌 만회할 것이냐."

아마 잘 된 연설이라고 생각했던지 그들은 이 글을 스스로 독립신문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언제입니까? 을사조약 7년 전입니다. 피아를 가리지 못한 이런 내부 공격과 군중 선동이 나라에 무슨 이득이 되었겠습니까? 이 논조는 그들의 선배 김옥균, 박영효가 10여 년 전 펼쳤던 것과 흡사합니다. 그들에게는 무지하나마 있어야 할 순수성조차 없어 보입니다.

17세에 일본에 유학 간 윤치호는 게이오 의숙 총장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김옥균을 이용했다가 버린 그 사람입니다. 윤치호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이었습니다. 매일 밤 영어로 일기를 쓴다고 말하는 윤치호는 지금 이곳에서 독립 운동 무용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무용론을 펼치려면 뭐 하러 독립협회를 만들었는지요? 우리 국민들은 신사유람단의 조교 그룹이 만든 독립협회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퇴폐로 물드는 식민지 문화
 
저널리즘을 장악하고 있는 계몽주의자들이 조선을 개조해야 된다고 하면 총독부가 나서 구체적 행동에 들어갑니다. 국민들은 그것을 감시할 눈을 잃게 됩니다. 계몽주의자나 총독부와 밀착되어 있는 예술가들이 조선 사회를 온통 연애지상주의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애인을 위해 죽는 것을 삶의 구원인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조선의 신문들은 끊임없이 여성을 대상화하며 연애라는 주제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민족을 거론하는 일은 빼먹지 않습니다. 이제는 연애를 하는 일이 민족을 선진화하는 일과 혼동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 모르는 본처를 버리고 새로운 애(愛)의 대상을 구한다’ 하며 연애 소동과 이혼소송이 잇따르고 있고, 헤어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정사(情死)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연애와 정사는 이곳 신문들의 주력 상품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독살 미인 김정필 외에 강향란, 강명화, 신일선, 박금례 등의 여자가 사련(邪戀)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최근 동아일보에는 한 여인의 음독자살 사건이 4단 기사로 대서특필되었습니다. 그리고 관련 기사로 ‘강명화의 애화’라는 긴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 밑에는, ‘꽃 같은 몸이 생명을 끊기까지에 그네의 생활에는 어떠한 비밀이 있었던가?’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지난 6일 밤에 그는 장병천을 보고 몸이 불편하니 온양 온천에나 가자고 간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아침 특별 급행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평생 입을 벌리지 않던 전례를 깨치고 강병천에게 옷감과 구두를 사 달라고 하였다. 평생 돈 드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던 강병천이는 옥양목 의복 일곱 벌과 구두를 사 주었는데 그것이 수의가 될 줄은 강명화 자기 밖에는 몰랐었다. (중략)

온천에 이른 그는 자살할 기회만 타다가 마침내 10일 하오 몰래 사 두었던 ‘쥐 잡는 약’을 마시었다. 약을 마시고 난 강명화는 즉시 장병천의 품에 안겨 말했다.

“나는 벌써 독약을 마신 사람이니 마지막으로 안아나 주시오.”

놀라운 소리를 들은 장병천과 마침 함께 있던 모 씨는 일변 의사를 불러 약을 토하게 하며 일변 경성으로 전보를 놓아 그 모친을 오게 했으나, 그는 11일 하오 여섯 시 반에 애인의 무릎을 베고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장병천이가,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라고 묻자,
그는 눈물에 젖은 야윈 낯에 웃음을 싣고,
 “세상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 ---- 건”

이라고 일렀다 한다. 파건은 곧 장병천의 별호이니 그의 마지막 일념은 파, 건 두 자에 맺히었던 것이다.

저는 이 사건의 당사자들을 모르니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느낌으로 이 기사는 거의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온양 온천에 간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인 장병천도 같이 갔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왜냐 하면 그녀의 자살을 신고한 사람은 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이 같이 있던 모 씨는 누구란 말입니까? 그리고 기사대로 그녀가 평생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들은 일본에 같이 가서 눈에 나는 행동을 많이 하여 양식 있는 유학생들의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게다가 갑부의 아들 장병천의 사생활은 문란한 편이어서 언제나 주변에 여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문은 이들을 순수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녀의 죽음을 미화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는지요? 그래야 신문이 많이 팔리고 광고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신문과 잡지마다 ‘신성한 연애에 희생된 절대 가인’이라거나  ‘무정한 사회가 그를 죽였다’ 고 활자를 뽑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세대의 공격에 희생된 신세대의 사랑’이라고도 했습니다. 대관절 한국의 구세대는 누구입니까? 틈만 나면 신문들은 조선의 풍습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사가 아닙니다. 공중누각 같은 픽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 4종이나 출간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개조하면 ‘모던보이’와 신여성이 되는 것이고, 그들은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노자영의 연애 서간집 <사랑의 불꽃>은  <무정>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신문 만평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가 단연 연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피아노· 만돌린· 하모니카· 바이올린, 하이네·바이런 같은 서양 것들이 꼭 함께 따라붙습니다.
 
계몽주의자들과 신문과 통속소설이 총독부와 담합하여 조선을 망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후유증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길지도 모릅니다.

이제 조선의 밤은 더럽혀졌습니다. 별이 총총하고 청개구리가 우는 건강한 밤이 아니라 사련에 속고 치정에 죽는 나약한 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병약한 사련이 미화되고 맹목적인 치정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건전한 민족의식의 촛불은 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대중의 모습을 보며 진고개와 충무로의 기생가에서는 사이비 민족 세력과 친일 세력이 득의의 웃음으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화 동지, 정화 동지야말로 매력적인 조선의 여성입니다. 동지의 편지를 받는 일은 제 삶의 일대 행운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이 편지마저도 끊어지지 않을까 문득 두려워집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국에서, 김영세 올림.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독립협회 #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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