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91] 이유 없이 시작된 여인의 음모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22 08:03수정 2008.07.2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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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민혜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붓을 놓고 말았다. 그녀는 어제 조순호의 집에 놀러 갔었다. 조순호는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나민혜를 반갑게 맞이했다. 신식 양장을 한 나민혜의 손에는 양산이 들려져 있었고 머리에는 서양 모자가 얹어져 있었다. 그녀의 모자는 8자를 옆으로 눕힌 날렵한 모양이었다.

나민혜는 조순호가 자기의 차림새에 대하여 한 마디쯤은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나민혜는 거울 앞에 가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최린을 만나고 온 나민혜

“앉아라, 얘. 모자는 계속 쓰고 있을 거니?”
좀 머쓱해진 나민혜는 모자와 양산을 방바닥에 놓고 앉았다.
“잔뜩 멋을 내고 어디에 갔다 오는 길이니?”
“모임에 갔다 왔어. 장안의 지식인 신사들을 많이 만났어.”
“신사들? 그 사람들이 누군데?”
“송진우, 최남선, 그리고 최린 등이었어. 특히 최린 선생은 정말 괜찮더라.”
“그 사람 나이가 좀 많지 않아?”
“그렇긴 해. 아마 40대 중반쯤 됐을 거야.”
“민혜야, 그러면 할아버지야.”

나민혜는 할 말을 잊었다.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은 말할 것도 없고,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최린 등은 당대의 최고 지성이었고 유명 인사였다. 그들을 만났다고 하면 누구나 흥미를 보이거나 은연 중 선망하는데 조순호만은 예외이기 때문이었다.

예외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할아버지라고 일축해 버리는 조순호에게 그녀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에 하려고 했던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민혜가 다음에 하려고 했던 말이란, 최린은 중후하고 자상한 신사라거나, 그는 곧 구미 20여 개국에 여행을 간다는 말 등이었다.

나민혜는 김문수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다른 남자 얘기에는 전혀 무관심한 조순호가 김문수에게는 유별나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 던져 보듯이 조순호에게 말했다.


“김문수씨는 내 양장과 모자에 매혹되었다고 하더라.”
사실 그것은 최린이 한 말이었다.
순간 조순호의 얼굴에 미동이 나타나는 것을 나민혜는 놓치지 않았다.
“김문수씨가 그런 말을 하던?”
나민혜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말을 했다.
“자꾸 내 유학 일정을 묻기도 했어.”
“왜?”
“내 일정에 따라 자기 삶의 계획이 달라진다는 거야.”

조순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민혜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그 말이 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조순호는 나민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유학에 맞춰 자기도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유학을 갈 거라고 하던데….”
“그래? 사표는 벌써 낸 걸로 알고 있는데.”
“뭐라고?”
“얼마 전 만났거든.”
“어떻게?”
“김문수씨에게서 한 번 보자고 편지가 왔어.”

나민혜는 은밀히 놀라고 있었다.

나민혜가 그림을 그리다 불현 듯 붓을 놓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문수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민혜의 은밀한 음모

관훈동 3층 건물의 1층에는 ‘까까듀’라는 이색적인 이름의 다방이 있었다. 영화 <장한몽>을 만든 감독이 차린 다방이라고 했다. 주인은 하와이에서 데려온 한 여성과 함께 이 다방을 운영하면서 직접 커피를 끓이기도 한다고 했다.

김문수는 약간 어두운 다방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벽을 둘러보았다. 다방의 벽은 커피 포대와 한국의 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만 하면 파격적인 실내 장식이었다.

나민혜는 김문수가 실내를 다 볼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민혜는 위스키를 섞은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자 김문수는 자기는 아예 위스키로 달라고 했다.

“신문사에 들어가셔야 되잖아요.”
“아, 회사는 이미 그만 두었습니다.”
“어머!”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문수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나민혜씨, 요즘 어려운 일이 있나요?”
“그렇게 보이세요?”
“지금 보니까 그러네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위스키를 비운 김문수가 한 잔 더 시켜 볼까 하고 두리번거릴 때 나민혜가 말했다.
“더 하시겠어요?”
“좋습니다.”
나민혜는 위스키를 두 잔 주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김문수가 두 번째 잔을 비우자 나민혜는 자신의 술잔을 앞으로 밀며,“이거, 더 하세요” 하고 다소 처량한 음색으로 말했다.

나민혜는 유학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녀는 요즘 그림도 잘 안 된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붓을 놀리다 보면 김문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런 문제를 김문수와 상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데 “너는 신문사를 그만 두면서 어찌 나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김문수는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너무 무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선생님은 유학 가실 생각 없으세요?”
“가고 싶어요. 나도 민혜씨같이.”

그 날 저녁 곧장 나민혜는 조순호를 찾아갔다.
‘나도 민혜 씨같이 유학을 가고 싶다’
김문수는 이렇게 말했는데, 나민혜는, ‘나도 나민혜씨와 같이 유학을 가고 싶다’ 이렇게 말했다고 나민혜는 조순호에게 전하며 조순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날 저녁 조순호는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예배 음악의 반주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묻혀진 역사의 이면이 소개되고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의 저항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묻혀진 역사의 이면이 소개되고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의 저항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최린 #까까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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